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임 Jan 05. 2024

'떡볶이' 앞에 서면 소녀가 된다

대전, 중앙로 지하상가 '바로그집'

2023년 마지막 연휴를 두부와 도시에서 지냈다.

나의 고향 대전에서.    

 

 대전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고, 학교를 졸업하고 멀고 먼 객지에서 떠돌며 고향을 그리워하다 돌아와 결혼해서 사랑하는 아들과 만났다.

시간은 얼마 흐르지 않았는데, 안타깝게도 서로의 이상이 맞지 않아 내 아들의 아빠와 이혼하고 빠이빠이 손을 흔들며 고향을 떠났다.

다시 유학길에 들어섰다.

어떻게 보면 고등학교를 지나 성인으로 거듭나면서부터 40대 중반까지 반은 고향에서, 반은 객지를 계속 오가며 살았던 것 같다.     


겨우 만 스무 살에 먼 타국 영국에서 제일 생각나는 것이 ‘떡볶이’ 그리고 ‘어묵과 국물’이었다.


두 번째 유학하던 이탈리아에서 고생할 때마다 생각났던 음식이 ‘하얀 쌀밥’에 갓 버무린 ‘겉절이’, 반찬으로 ‘떡볶이’ 그리고 ‘어묵과 국물’.

그래도 요리사라고 차이니스 캐비지 (배추)를 사고 빨간 고추를 갈아 겉절이 비스름한 요리는 만들어 먹었지만, 떡과 어묵은 구할 수 없어 참아야 했다.


세 번째 호주 시드니에 살며, 나름 요리사라고 먹고 싶은 건 다 해 먹고살았다. 오죽하면 도토리묵에 팥칼국수도 만들어 먹었다.

그런데, 옛날이 그리울 나이도 아닌데 학교 다닐 때 먹던 커다란 가래떡이 들어간 떡볶이가 가끔 생각났었다.

    

떡볶이를 얼마나 좋아하면 떡볶이가 생각이 날까 하는 사람있지. 하지만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떡볶이가 같이 했다 해도 맞을 다.

아마 대전에 살았던 와 동년배들이면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르겠다.


떡볶이는 나와 우리 친구들의 소울 푸드였다.  

   

각설하고, 가 떡볶이 이야기하려 한 건 아니었다.     


두부와 도시에 온 이유는 우리에게 크리스마스 선물과 새해 선물을 하기 위해서다.

먼저 미장원에서 예쁘게 파마를 했다. 그리고 백화점은 못 가도 대흥동 지하상가에 가서 옷도 구경하며, ‘성심당’에서 맛있는 빵을 사고,  맛난 음식도 먹자며 폴짝폴짝 뛰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들어선 지하상가에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다.

타로를 보는 집들 사이에 ‘바로그집’ 떡볶이집이 리모델링을 했는지 깔끔하고 어수함이  사라진 모습으로 있다.


“완전 바뀌었는데.”

“언니 안 먹고 갈 거야?”

“일단 ‘성심당’부터 가보자.”

떨어지지 않는 눈길을 ‘바로그집’ 앞에 놓아두고 우리는 ‘성심당’이 있는 중앙부로 걸어간다.  

    

“연휴인데 사람이 별로 없네.”

“밥시간이라 밥 먹으러 가지 않았을까? 울 아들도 여자친구하고 이 근처에서 밥 먹고 있을걸.”

“언니, 아들한테 전화해 봐.”

“벌써 통화했지. 올해는 여자친구에게 크리스마스 양보한다고 전해달라 했어. 나 좀 기특하지 않냐?”

“잘했오.”라는 말을 끝으로 우리의 눈을 휘둥그레졌다.



우와~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 저 많은 사람을 어떻게 헤치고 지나갈 것인지 앞이 막막하다.

겨우 사람들 틈을 비집고 간 ‘성심당’ 앞은 북새통이었다. 여길 들어가겠다고 기다렸다간 떡볶이도 못 먹고 산천으로 내려가야 할 판이다.

“언니 어떻게 할 거야?”

처음엔 대답을 못 하고 애꿎은 입만 두 손가락으로 잡아 뜯고 있었다. 그러자 두부가 줄을 다.

“줄까지 있다 갈 시간은 없을 것 같다.” 하며 두부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아쉽지만, 다음에 오겠다는 눈인사하고 씩씩하게 떡볶이집으로 향했다.


북적대던 사람들을 지나 ‘바로그집’ 앞에 왔다.  

   

이 ‘바로그집’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내의 고등학교 시절 포장마차로 시작한 가게다.

가 다니던 화실이 은행동이란 동네에 있었다. 대전 최초의 백화점이 들어선 곳이기도 하다. 넘쳐나는 71년생들이 거리를 휘어잡고 다녔던 거리다.     


그중 메인거리는 동갑내기들의 수많은 입을 책임져준 떡볶이를 파는 포장마차로 가득 메웠었다.


커다란 가래떡으로 만든 떡볶이에 큼지막한 어묵이 있었고, 듬성듬성 썬 양배추와 대파가 한데 어우러졌다. 그 사이에 떡볶이 국물을 머금은 껍질을 깐 달걀을 서로 먹으려고 포크가 챙챙 거리며 싸우던 소리가 아직도 귀에 들이는 듯하다.


그뿐인가, 당근, 시금치, 단무지뿐인 꼬마김밥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이었다.

화실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 밥 먹으러 나와서 하나, 그것도 모자라 떡볶이로 배를 채우던 날도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희끄무레하게 흰색을 섞였지만 분홍색이 되지 못한 붉은색을 띤 떡볶이가 나타났다. 양배추도 대파도 없이 그냥 국물만 가득한 떡볶이였다.


아이들이 “너 저기 새로 생긴 떡볶이 먹어봤어?”라며 “채소는 없는 떡볶인데, 뭐라 말은 할 수 없지만, 자꾸 생각나.”하더니 먹으러 가자고 친구들이 내 화판 주위에 모였더랬다.

그 기회를 놓칠 순 없어, 4B연필을 내려놓고 아이들을 따라나섰다.


내가 좋아하던 양배추는 없었지만, 달걀을 반으로 갈라 소스를 올리니 “오호, 달걀 맛이 확 사는데.” 다시 꼬마김밥을 소스에 찍어 먹으니 “김밥이 맛있어.”라며 친구들과 내일 다시 들리자며 불러오던 배를 원망하며 포크를 내려놓아야 했다.     


그렇게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을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던 포장마차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성심당’ 앞에 있는 골목 코너에 ‘바로그집’이라는 간판을 걸고 장사를 시작했다.

이젠 자리에 앉아서 먹을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 대전을 떠났지만, 집에 와 친구들을 만나면 항상 떡볶이를 먹으러 다녔다.

심지어 클럽에 간다고 블링블링한 옷과 핸드백에 높은 하이힐을 신고도 떡볶이집만 보이면 “이건 먹어줘야 해.”라며 대여섯 명이 친구들이 줄을 서서 먹었다.

떡볶이와 젊은 날을 같이 했다 해도 될 만큼 많이도 먹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그집’이다.     

지금 위치한 대전 중앙로 지하상가에 자리를 잡고 장사한 지 꽤 오래됐다.

이제는 종이에 메뉴를 써서 줄 필요도 없이 주문 태블릿이 자리마다 놓여있다. 정갈함을 자랑하듯 여전히 주방은 뻥 뚫려 있다.


얼마 전 들렸을 때 맛이 변한 것 같아 아쉬웠지만 이번 방문에는 여전한 맛을 다시 보여주어 안심했다.

조금 아쉬웠던 것은 커다란 통 가래떡이 아닌 가운데 구멍이 뚫린 떡을 이용하고, 꼬마김밥이 아닌 일반크기 김밥을 판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예전에 먹었던 떡볶이집이 하나둘 없어지고 아마도 여기가 유일하지 않나 싶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이 자리를 지켜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져본다.    

 

“언니, 떡볶이 나왔어. 얼른 먹고 가자.”

“그래 갈 길이 멀다. 얼른 먹자.”     


학창 시절의 추억은 다음에 와서 다시 하도록.



이전 07화 코로나 팬데믹도 이겼던 '전주비빔밥'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