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들아, 죽순 따러 가자
11. 시골 아이들이라고 농산물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하면 오산
“자~ 죽순 따러 갑시다.”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들린다.
“형 우리 어디가?”, “어디?”, “나도 몰라”, “청소한다며?”, “네가 선생님께 물어봐”, “차 타고 가는 거야?”
그냥 나에게 대 놓고 물어보지는 않고 자기들끼리만 속닥거린다.
“얘들아, 차 안 타고요. 신발 신고 저기 텃밭 뒤로 가는 거야.”
아이들은 내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뽀르르 걸어가 열린 창문에 매달려 몸을 좌우로 움직여 쭉쭉 뻗으며 “어디요? 어디?”라고 물어본다.
“저기 봉쌤 관사 보이지. 그 옆에 대나무.”
“거기에 죽순이 있다고요?”
그런데 이 녀석들 죽순이 뭔지는 알까? 에이 시골 사는데 모르겠어!라는 생각은 오산이다.
모른다.
부모님은 공부 잘해서 도시에 있는 대학을 졸업하고, 책상에 앉아 일하는 직업을 갖기를 바라며 농사일은 전혀 시키지 않기도 하거니와 부모님이 아이에게 관심이 없거나, 나이가 많거나, 연로한 조부모님과 사는 경우가 많아 책상 앞에 앉아 만화책을 보건, 게임을 하건 공부하는 줄로 알고 있다.
“응. 많아. 전에 왔을 때도 살펴보고 갔어.”
아이들이 내가 서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그럼 우리 나가요?”라며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다.
“선생님이 왜 통하고 칼을 들고 서 있겠어.”
나가자고 고개를 까딱이며 몸을 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아이들이 기다렸다는 듯 앞다투어 내달린다.
“뛰지 마.”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뿐사뿐 걷다가 신발을 신더니 다시 뛰기 시작한다.
뒷모습은 완전 초딩이다. 그런데 원래 중학생이 저러나?
우리 애도 사내아인데 유치원 졸업하고는 뛰어다니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저 녀석들은 복도에서도 뛰고. 교실에서도 뛰고. 아무래도 오늘 저녁, 아들에게 전화해서 물어봐야겠다.
아주 오랫동안 학교 담벼락 안쪽에 자리 잡고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 두툼한 왕대. 커다란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도 않고 우직하게 서서 작은 숲을 이루고 있다. 이리저리 대밭 사이를 둘러보지 않아도 댓잎이 쌓여있는 곳에 죽순이 우후죽순 솟아나 있다.
봄이면 아이들의 수업재료 최고인 대숲은 이미 잊힌 장소인지 군데군데 버려진 플라스틱, 종이박스가 널브러져 있고 저 끝엔 음식물 쓰레기도 쌓여있다.
윤산중학교는 폐교 위기를 극복하고자 얼마 전부터 도시에서 단기 유학 학생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학교는 도시에서 유학 오는 아이들을 위해 시골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텃밭과 작은 정원을 만들고 정자를 지어주느라 난리법석 중이다. 그런데 있는 장소도 이용하지 않으면서 새로 만든 정원이나 텃밭은 얼마나 이용할 수 있을까?
중요한 건 보기만 하는 텃밭엔 아이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거다.
어찌 되었든 텃밭은 요리 동아리가 사용할 수 있는 장소라 뭐. 더는 불만이 없고.
커다란 죽순을 찾으려 숙였던 허리를 들어 아이들이 둘러보는데, 재범이가 기다랗고 가느다란 막대기를 흔들면서 잡으러 오는 친구도 없는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뛰어다니고 있다.
“재범아, 재범아.” 들고양이가 도망가는 쥐를 뒤쫓듯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가만가만 얘기해도 울려 퍼지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
“그리야, 저 시끼 잡아와.”
마음 같아선 저 막대기를 확 잡아서 던져버리고 꼴 밤을 한 대 날려주고 싶지만, 재범이는 잘 못 한 게 없다. 그저 수업이 늦춰지고 있을 뿐.
그리가 재범이에게 다가가서 한 대 툭 치더니 서로 무슨 말인지 주고받고 그리가 재범이 팔을 잡고 끌고 온다. 잡고 오는 그리는 심각하고 잡혀 오는 어리둥절한 재범이의 얼굴이 웃겨 웃음이 터져 나올뻔했다.
“재범아, 지금 수업 시간인데.”
“아니, 저기 뭐가 날아다녀서.”
이 녀석 들고양이 맞네.
“여길 봐봐. 아주 두껍고 튼실한 죽순이지. 죽순은 지역과 품종에 따라 4월부터 나오기 시작해서 여름이 오기 전까지 딸 수 있는데, 여기는 햇빛을 바로 받아서 일찍 억세어질 것 같아. 쌓인 댓잎을 걷어볼게.”
손으로 댓잎을 살살 걷어냈더니 연두색이 살짝 깔린 뽀독뽀독한 노란색 속살이 나오고 그 밑에 보랏빛과 밤색이 어우러진 점들이 드러난 밑부분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점들에서는 뿌리가 생겨날 거야. 이점이 없는 위쪽을 잘라주는 거야.”라며 고개를 들었다.
아이들 머리가 하나로 모이며 나에게 곧 쏟아질 것 같아 죽순을 자르고 얼른 피했다.
아이들이 따 놓은 죽순을 들고 “이걸 먹나 봐. 신기하네. 껍질에 털이 있는데.”라며 이리저리 굴려보고 만져보고 있다.
“너희도 하나씩 잘라봐. 조심해서. 빨리하지 말고 선생님이 말한 대로 죽순 한쪽을 삼분에 이 정도 칼로 쑤욱 자르고, 칼을 통에 넣어 둔 후에 꺾어서 뽑아내는 거야.”
“네.”
“죽순 찾아서 서 있으면 선생님이 한 사람씩 봐줄게.”
“선생님. 여기요”라며 펄쩍펄쩍 뛰는 래도가 날 부른다.
기다랗게 커 올라 죽순에서 벗어난 어린 대가 서 있다.
“요렇게 키가 크고 싸매어진 껍질 위로 뾰족뾰족하게 잎 비슷한 것이 올라오며 벌어지지.
그리고 끝쪽을 자세히 보면 연두색이 보이거든 그러면 ‘얘는 이제 죽순이 아니구나’라고 생각하면 돼. 요렇게 커서 저렇게 큰 대나무가 되는 거야. 긴데도 안 쓰러지는 게 신기하지?”
“얘들도 변하면서 크네요.”
“그래, 너희처럼.”
“그냥 작은 대나무가 잘 자라면 큰 대나무가 되는 줄 알았는데.”
“그랬어. 조금 키가 작고 오동통한 죽순을 찾아보자.” 하긴 모르는 사람이 보면 기다란 죽순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선생님. 여기 많아요.” 나범이가 부른다.
“우와 여기는 정말 많네. 나범이가 잡고 잘라 볼래.”
슬금슬금 톱질하듯 죽순을 반보다 조금 더 자르고 칼을 통에 넣고 죽순을 꺾어서 뽑아아아냈다.
“잘했어. 조심조심해야 해. 작은 건 자르지 말고 커다랗고 통통한 죽순만 따는 거야.”
“네.”
나범이의 머리를 한번 쓸어주고 고개를 돌려 다른 아이들을 찾았다.
대나무 사이에서 재범이가 막대기를 얼굴 앞에 들고 흔들어대고 있다. 아, 또 뭐가 날아다니나?
“재범아, 뭐 해?”
“거미줄, 거미줄이요.”
에고에고.
누군가 다가와 내 등을 툭툭 친다. 뒤돌아보니 그리다.
“왜.”
“저도 찾았는데요.” 들리지도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말하는 그리가 답답하지만 어쩌랴.
“그래 가보자.” 칼이 들어있는 통을 들고 그리를 따라갔다. 정말 실한 놈을 찾아냈다.
“아이코, 잘 찾았네. 그리가 따봐.”
조심스럽게 칼을 들고 조금씩 조금씩 잘라내더니 칼을 나에게 준다. 그리고 죽순을 천천히 꺾어 뽑아낸다.
“잘했어. 이젠 혼자 할 수 있지?”
그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멍한 얼굴로 내 뒤만 졸졸 따라만 다니던 귀차니스트 디엔이 “선생님 인터넷에서 주문해요.”라며 사서 만들자고 투덜거린다.
"선생님 요리사가 되면 이런 일이 많아요. 직접 재배하고 따와야 하고? 농사 싫은데. “
나는 뒤돌아 디엔이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