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순 구 09화

사랑하는 당신에게!

by 리얼라이어

아버지의 일기를 읽다가 낱장으로 된 편지 몇 장을 발견했다. 두 분의 결혼기념일 맞아 아버지가 엄마에게 쓴 편지인데, 아내를 향한 남편의 애틋함이 차분하고 평온하게 담겨 있었다. 당시에 엄마가 이 편지를 낭독하면서 두 분 모두 그 날을 잠시나마 떠올리며 이런저런 옛이야기를 주고받으셨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편지들은 아버지 일기장에 고이 보관되어 있었던 것 일까? 분명히 금일봉은 엄마 주머니로 쏙 들어갔을 터인데 말이다. 나중에 엄마한테 꼭 물어볼 일이다.


글 © 순 구 | 사진 © 슬로우 스타터
오늘은 38째 맞이하는 결혼기념일이다. 집사람에게 편지와 함께 얼마 되지 않지만 신권으로 바꿔 아내에게 전달하였다. 너무 새 돈이라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을 하면서 받아 놓는 아내의 미소에 짠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서 남이섬에 일을 갔으니 외식은 물 건너갔다. _ 2016년 2월 11일 목 맑음


1년 후, 39번째 맞이하는 두 분의 결혼기념일 당일에 적힌 아버지의 일기에는 금일봉 얘기가 없다. 혹, 1년 전 결혼기념일 그 편지를 소홀히 한 아내에게 소심한 복수를 한 것일까? 일기를 보면 그렇지 않아 보이는데 말이다. 이 또한 나중에 엄마한테 꼭 물어봐야겠다.


글 © 순 구 | 사진 © 슬로우 스타터
보름이다. 38년 전 오늘 세종호텔에서 아내와 결혼식을 거행한 것이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가운데 그 세월이 벌써 38년이 흘렀다. 늦장가에 들뜬 기분을 억누르면서 식을 거행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그 날의 일들이 어찌 이렇게 눈 앞에 생생하게 펼쳐지듯이 환하기만 하던가? 하나서부터 열까지 어느 것 하나 생각나지 않는 것이 없으니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지만 그때의 기억은 새롭기만 하다. 아침에 아내에게 그 날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편지를 전해 주었다. 아주 기쁜 얼굴이어서 엄청 행복함을 느꼈다. _ 2017년 2월 11일 토 맑음


두 분의 결혼기념일 햇수가 가리키고 있듯이 당시 삼십 대 후반인 나는 현재 마흔이 넘었다. 나 또한 두 분처럼 출가하여 매년 결혼 기념을 맞이한다. 아버지의 일기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엄마에게 건넨 결혼기념일 편지는 나의 그것과 양질 모두 확연한 차이와 다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세월의 흔적까지 더하면 감히 범접할 수도 없다. 언젠가 집 서랍을 모두 뒤져 내가 아내에게 건넨 결혼기념일 편지를 찾아보았다. 분명 편지로 내 마음을 전한 것 같은데 편지는 온 데 간데없고 죄다 조그만 메시지 카드에 몇 문장으로 끝 낸 것을 보니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발견한 낯선 편지 뭉치. 아뿔싸. 약속을 어겨 화난 아내를 풀어주려 쓴 자책의 문장이 구구절절하게 또박또박 쓰여 있는 것이 아닌가. 읽어 보지 않아도 무슨 이유로 아내를 속상하게 했는지 아버지 문장을 빌려 표현하자면 그 잘못한 일들이 눈 앞에 생생하게 펼쳐지듯이 환하기만 하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서랍 속 깊숙이 편지 뭉치를 밀어 넣었다. 부자(父子)가 달라도 이렇게 달라서야 되겠는가! 아버지가 엄마에게 건넨 편지 속 문장을 수련하는 마음으로 필사를 해야겠다. 가능하면 먹지를 대고 써야 할까 보다. 아버지의 훌륭한 필체도 닮고 싶으니까 말이다.


글 © 순 구 | 사진 © 슬로우 스타터
글 © 순 구 | 사진 © 슬로우 스타터
글 © 순 구 | 사진 © 슬로우 스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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