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을 줍는 것
초등학교 6학년 때 내 꿈은 환경부장관이었다. 학급문집에 그런 글을 쓴적이 있어서 확실히 기억한다. 어렸을 때 나는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주말이면 우리 가족은 함께 동네 뒷산에 오르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봉투를 들고 나섰다. 집 싱크대 맨 윗 서랍을 열면 수북하게 들어있던 검정이나 불투명한 아이보리색의 흔한 봉투. 그것들 중 두개를 골라집어 산에 가서, 등산초입에서부터 쓰레기를 주워담기 시작했다. 하산할 때쯤 되면 봉투 두개가 모두 윗부분이 묶이지 않을 만큼이나꽉 들어차는 일이 매주 반복되었다.
쓰레기의 종류는 대부분 과자봉지와 담배꽁초였다. 꽁초를 줍는 일은 좀 더럽게 느껴졌지만 낙엽같은걸 활용했던 것 같다. 부모님도 나를 응원해주었고, 무엇보다 산을 오르내리는 주변 어른들의 칭찬이 그렇게 자랑스러웠다. "야~너 참 착하다"는 아저씨들의 -오버가 가득 섞인-탄성과 "어머. 니 덕에 깨끗한 산에 오게 되서 너무 좋다. 고마워!"라고 호들갑스럽게 말해주던 아주머니들의 음성. 내가 지나가면 한결 깨끗해지는 산의 모습보다 그런 게 더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나름 열심히 하던 쓰레기 줍기를 그만뒀던 건 산에서 만난 한 어른 때문이었다. 늘 칭찬을 해주던 어른들만 만나왔던 탓에 그가 다가올 때 나도 모르게 두 눈을 지나치게 반짝인걸까. 그는 마주친 내 눈을 차갑게 바라보면서 “운동하러 왔으면 운동이나 하지 쓸데없는 짓을 한다.”라는 말을 건내고 사라졌다. 이제와 옮겨적어보니 그렇게 심한 말이 아닌듯도 하지만,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에겐 너무 충격적인 말이었다. 봉투를 들고 있던 두 손이 어찌나 머쓱하게 느껴지던지.
그 어른이 단순히 내 마음에 상처를 준 일에 그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내 인생의 운을 상당부분 날려먹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건, 일본 프로야구선수 오타니 쇼헤이의 인터뷰기사를 읽고서였다. 오타니는 10년째 '줍깅'을 실천하고 있다고 한다. 그의 '줍깅'은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무대에서도 이어졌다. 경기 전 외야 잔디에 떨어진 쓰레기를 주워 뒷주머니에 넣는 모습이 일본 신문에 의해 포착되어 소개된 것이다. 이 모습을 보도한 일본 매체 폴카운트에 의하면 오타니의 고등학교시절 은사인 사사키 히로시 감독이 오타니에게 "쓰레기는 사람들이 떨어뜨린 행운이다. 쓰레기 줍는 것을 행운을 줍는다고 생각해라. 그러면 스스로 행운을 가져올 것이다"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메이저리그까지 진출한 것을 보면 오타니의 '떨어진 행운 줍기'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운을 못주워모아서인지(?) 나는 환경부장관이 못 되었고, 더 이상 쓰레기를 줍고 다니지도 않는 어른이 되었다. 이제부터라도 다시 '줍깅'을 하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운을 주워보자'는 생각 때문은 아니다. 동네에 버려진 플라스틱들을 보고 화가 잔뜩 난 딸의 모습 때문이었다 .딸의 환경보호에 대한 지식은 의외로 해박했다. 가족 간의 대화 끝에 우리는 주말마다 등산을 가서 ‘줍깅’을 하기로 했고 이를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줍깅'은 '줍기'의 오타가 아니다. 줍깅이란 봉사활동으로 걷거나 뛰면서 길거리의 쓰레기를 줍는 활동을 뜻하는 신조어다. '플로깅(plogging)' 이라는 말로 먼저 알려졌는데, 줍는다는 뜻의 스웨덴어 플로카업(plocka upp)과 달리기를 뜻하는 영어 조깅(jogging)을 더해 만든 단어다. 우리나라에서는 줍깅(줍다+걷다)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해졌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줍깅'을 실천하며 인증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정기적으로 플로깅 마라톤이 열리고, 귀드니 요하네손 아이슬란드 대통령은 집 근처에서 플로깅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 쓰레기줍는 사진을 올렸고, 많은 기업에서 줍깅 이벤트를 실시하고 있다. 용산구청에서는 '담배꽁초줍기 아르바이트'를 모집하기도 했다. 쓰레기'줍깅'이 필요하다는 것에 전세계적인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상처받았다고 웅크리고 있는 동안 세상의 수많은 착한 사람들은 쓰레기줍기를 계속해서 진행해오고 있었다.
줍깅이 효과가 있을까?
쓰레기를 줍는 건 사실 쓰레기가 있는 장소를 이동시키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분리수거를 하게 된다는 것도 의미가 있긴 하지만, '줍깅'이 갖는 직접적인 환경보호효과는 생각보다 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찾아보니 그 생각이 맞기도 하지만, '줍깅'을 하면서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의미가 있고 나아가 쓰레기를 아예 만들지 않는 삶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효과가 크다고 한다. 실제로 줍깅을 해보면 조금만 걸어도 얼마나 많은 쓰레기가 봉투를 금방 채우는 지 알게 된다.
생각지도 못했던 자연훼손행위를 멈추게 하는 계기도 된다. 등산을 자주 하다보면 산의 나무에 묶여있는 리본들을 심심찮게 발견하게 된다. 재미있다고만 생각했던 이 플라스틱리본들도 사실은 산의 쓰레기다. 산악회 등에서 주로 만들어 두는 이러한 이정표들이 묶인 나무를 '플라스틱 트리'라고 하는데, 이런 행위에 반대하는 '흔적 남기지 않기(Leave No Trace)' 라는 구호는 이미 1970년대 미국 환경보호 캠페인에서 등장했다고 한다.
아, 보다 개인적인 효과도 있다. 그냥 조깅이나 등산을 하는 것보다, '줍깅'을 하면서 얻는 운동효과가 훨씬 크다고 한다. 앉았다 일어섰다를 수없이 반복하면서 스쿼트효과를 얻게 된다고.
나이가 들어서 다시 시작한 줍깅을, 이번에는 지속적으로 해볼 생각이다. 또 다시 누군가로부터 '착한 척 하지마라'는 차가운 눈빛을 받는다고 해도 이제는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쓰레기를 주워모으다보면 쓰레기들이 한 곳에 유독 모여있다는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사람들의 악행에는 동조효과가 작용해서, 깨끗한 곳에 쓰레기를 선뜻 버리기보다 누군가 이미 쓰레기를 버려둔 곳에 '나도' 버리기가 훨씬 쉬운 것이다. 그렇다면 선행에도 비슷한 효과가 작용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