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창제 과정과 반포
초롱초롱 박철홍의
지금도 흐른다! 872
ㅡ 세종대왕과 한글창제 2 ㅡ
(훈민정음 창제 과정과 반포)
“세종대왕도 상을 받을 만하다.”
이것은 영국 BBC 방송이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 번역자인 '데버러 스미스'가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소식을 전하며 내린 결론이다. 스미스는 21세에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해, 불과 7년 만에 세계 최고 권위의 문학상 중 하나를 받은 인물이다. BBC는 이를 놀라운 일로 평가하며 “세종대왕이 상금 일부를 받을 만하다”고 언급했다.
BBC는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과 한글의 우수성에 주목했다. “슬기로운 자는 아침을 마치기도 전에 깨칠 것이고, 어리석은 자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문구를 인용 하며, 한글이 배우기 쉽고 과학적 문자임을 높이 평가했다.
얼마 전 방영된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도 훈민정음 창제 과정 을 깊이 있게 다뤘다.
이 드라마에서 세종은 조정대신들 반대를 미리 예상하고, 집현전 학자 일부만을 모아 극비리에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실제로 조선사대부들과 조정 대신들은 훈민정음 창제에 강력히 반대했다. 세종은 이를 예상하고 오랜 세월 믿을 수 있는 소수 집현전 학자들과 비밀리에 훈민정음 창제를 추진했다.
그렇다면 왜 조선사대부들은 한글 창제를 그토록 반대했을까?
훈민정음 창제에 가장 강하게 반대한 인물로 알려진 이는 집현전 학자 '최만리'다.
학창시절, 나 역시 한글창제에 반대했던 최만리를 마치 친일 매국노 '이완용'처럼 부정적으로 배웠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실제 최만리 는 세종이 아끼던 신하 중 한 명 이었고, 청렴결백한 인물로 ‘청백리’에 이름을 올린 존경받는 학자이자 대신이었다고 전한다.
그는 단지 보수적 성리학자이며, 중화주의적 세계관의 조선사대부 를 대표했던 인물이었다. 그의 상소문에는 당시 조선사대부들이 공유하던 가치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당시 조선사대부들의 ‘중화질서’ 는 단순한 외교 관계를 넘어서는, 천하질서이자 성리학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절대적 가치였다. 그런 맥락에서 중국한자를 사용 하는 것은 문명국의 상징이자 자긍심이었다.
최만리의 상소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중국 한자 외에 독자적인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중화질서에서 이탈하려는 무엄한 행위이며, 오직 야만국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조선은 당시 명나라 중심 중화질서 아래 있었고, 한자를 쓰는 것이 ‘문명’의 증거였다. 이런 상황에서 독자적인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중화에서 벗어 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고, 이는 곧 야만적 행동으로 간주 되었다.
사대부들은 여진족, 몽골족, 서하, 티베트, 일본 등 독자 문자를 가진 민족들을 ‘오랑캐’로 깔보며, 그들과 조선을 같은 수준으로 보는 것을 치욕스럽게 여겼다.
지금 생각하면 기가막히는 일이지만, 성리학 시대였던 당시 조선에서 이와 같은 인식은 사대부들의 시대적 한계이자 현실이었다.
그런 이유로 상소문에는 항상 최만리 이름이 가장 먼저 나오며, 그는 지금까지도 ‘한글에 반대한 어리석은 대신’이라는 오명을 안고 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최만리가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지만, 당시 그는 왕 앞에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는 당당한 학자이자, 존경받는 대신이었다.
최만리뿐 아니라, 역사를 돌아보면 당대 시대상황에 갇혀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고, 오히려 소신과 충정으로 나라를 위태롭게 만든 사례가 수도 없이 많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이념이나 특정 논리에 갇혀, 다른 생각은 아예 받아 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번 12.3. 비상계엄 사태를 겪으면서 수없이 보았다.
이러한 시대적 한계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 한계를 뛰어넘는 '세종' 같은 거시적 안목의 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한 시대다.
조선사대부들은 또 다른 이유로도 한글을 반대했다.
문자가 너무 쉬우면 여성, 평민, 천민까지 글을 익힐 수 있게 되고, 이는 곧 기존 유교적 신분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우려했던 것이다.
당시 문자란 단순한 소통 도구를 넘어 지배권력 상징이었다. 글을 아는 사람만이 정치, 행정, 학문을 주도할 수 있었고, 글을 읽지 못 하는 다수 백성은 권력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는 문자를 만드는 일은 권력 구조를 흔드는 혁명적 도구였다.
그러나 세종의 생각은 달랐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반포하며 그 이유를 서문에 다음과 같이 밝혔다.
첫째, “우리말이 중국말과 다른데도 중국 글자를 쓰니 불편하다.”
이는 우리말에 맞는 문자를 만들겠다는, 세종의 강한 민족 '자주정신'을 보여준다.
둘째, “어리석은 백성이라도 쉽게 익혀 편히 쓸 수 있도록 하려 한다.”
이에는 세종의 '애민정신'과 '실용정신'이 담겨 있다.
즉,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는 <세종의 자주정신, 애민정신, 실용정신>의 결실이었다.
한편, 훈민정음은 정치적 목적도 있었다는 해석도 있다. 고려 잔존 세력으로부터 체제를 안정시키고, 조선건국이념을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훈민정음 반포 이후 나온 첫 문헌은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노래한 <용비어천가>였다.
진정 백성을 위한 것이라면 <농사직설>, <향약집성방> 등 백성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책부터 한글로 펴냈어야 한다는 비판도 있다.
훈민정음은 쉽게 배울 수 있는 문자였지만, 그것이 곧 바로 환영받는 길은 아니었다. 반포 이후에도 조선 시대 내내 공식 문자로 자리 잡지 못하고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사대부들 반대로 국가문서와 공문서에는 사용되지 못했고, 서민과 여성들 사이에서 비공식적 으로만 전해졌다. 오히려 ‘쉬운 글’이라는 이유로 500년 가까이 멸시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은 살아남았다.
1908년 주시경 선생이 ‘국어연구학회’를 창립하고, 1927년 기관지 <한글>을 발간하면서 ‘한글’이라는 이름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한’은 ‘하나’ 또는 ‘큰’을 뜻하고, ‘한글’은 <우리 민족의 크고 자랑스러운 글>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글은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 집념이 만들어낸,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창제자와 창제 시기가 명확한 문자다.
한글 과학성과 독창성은 국내외 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한류' 영향으로 오늘날 한글을 배우는 외국인들도 계속 늘고 있다.
훈민정음은 단순한 문자가 아니라, 민족 자주성과 애민정신, 그리고 미래를 향한 실용정신이 담긴 위대한 유산이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반포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여전히 복잡한 한자를 사용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한글은 단순한 문자가 아니다.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자, 세종대왕의 위대한 통찰력이 낳은 결실이다.
이제는 세계가 주목하는 문자,
한글은 인류 문화유산 보석이다.
요즘 한류 덕분에 한글을 배우는 외국인들이 많아졌다고 하니,
세종대왕께서도 흐뭇해하실 일이다.
– 초롱박철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