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밖 청소년 갭이어 프로젝트
아침 공기는 아직 겨울의 끝자락을 품고 있었다. 청도의 글램핑장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아이들은 이미 자리잡고 있었고, 조그맣고 낡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그 공간을 따스하게 채우고 있었다. 그날은 갭이어 프로젝트의 마지막, 아이들이 일 년 동안의 시간을 정리하고 각자의 이야기를 꺼내놓는 자리였다.
“결과를 원하지 않습니다. 과정을 중요시하는 시간이에요.”
마이크를 잡은 진행자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사실 과정이라는 단어는 어쩌면 교사인 나를 위한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학교 밖 청소년들을 지도하는 교사로서, 나는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과정을 말해왔다. 무언가를 시작하기만 해도 충분하다고, 결과를 꼭 손에 쥐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정작 나 자신은 늘 결과에만 매달리고 있던 건 아닐까.
아이들은 하나둘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39장을 그렸어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냥 그림 그린 건데도, 갭이어 프로젝트라고 이름 붙이니까 멋있어 보이더라고요.”
평소 말수가 적었던 지수가 발표를 했다. 나는 그녀가 들고 온 스케치북의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익숙하지 않은 선들이 자유롭게 춤추고 있었다. 그림마다 흐릿한 연필 자국이 남아 있어, 지우개를 얼마나 자주 눌러댔는지 짐작이 갔다. 그럼에도 그녀의 목소리에는 작은 떨림과 함께 어떤 자부심이 묻어났다.
무언가를 꾸준히 한다는 것. 그건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다. 나는 보라의 그림 속 불완전한 선들이 내 눈에 유독 아름답게 보였다. 그녀는 하루에 한 장을 채우지 못한 날도 많았을 테지만, 일 년의 끝에서 마주한 39장은 그 자체로 완벽했다.
“저는 2호선 사진을 찍으려고 했어요. 하지만 다는 못 돌고 3분의 1만 했어요. 그래도요… 사진 찍으면서 밖에 나오니까 정신이 좀 나아지더라고요.”
발표를 한 준호의 말이 내 마음을 툭 건드렸다. 교실 밖 세상은 어지럽고 막막할 때가 많다. 그럼에도 그는 지하철역이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 자신만의 풍경을 찾아 나섰다. 사진 속 신매역과 사월역, 그리고 누군가의 뒷모습이 고요히 화면을 가득 채웠다.
준호는 말했다. “닭갈비집이 스타벅스로 바뀌었어요. 좀 슬프더라고요.”
그의 슬픔은 변해버린 풍경에 대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 안에서 잃어버린 자신의 시간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 말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변화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찾아오고, 그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버티며 나아간다.
“이주 배경 청소년이 저 같더라고요. 한국어를 잘 못하는 친구들이 학교에 못 가는 거예요. 그래서 템플릿을 만들어 보려 했는데… 결국 못했어요.”
말끝이 흐려지는 지영이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건 스스로를 자책하는 미소가 아니라, 비록 해내지 못했어도 무언가를 시도했다는 안도감에 가까웠다. 그녀는 이어 말했다.
“갭이어가 아니었으면 그 선생님에게 먼저 말도 못 걸었을 거예요. 제가 그 활동을 시작한 것만으로도 큰 일이에요.”
그녀의 말은 나에게 ‘성취’라는 단어를 다시 정의하게 했다. 우리가 마주한 작은 시작들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깨닫지 못한 채, 늘 눈앞의 결과만 좇아온 나를 돌아보게 했다. 아이들의 갭이어는 완성되지 못한 템플릿과 채우지 못한 스케치북, 그리고 돌지 못한 2호선의 역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 미완성의 흔적들은 그 자체로 그들의 성장을 증명하고 있었다.
발표를 마친 아이들이 제자리에 앉았다. 작은 목소리들이 차례로 모여 하나의 큰 울림이 되었다. 발표회를 마무리하며 나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해낸 것들은 다 값진 거야. 완성하지 못한 프로젝트도 실패가 아니야. 이건 너희가 앞으로 나아갈 또 다른 시작이니까.”
말을 마치고 창밖을 바라보니, 겨울의 끝에 잔뜩 움츠러든 나무들이 보였다. 하지만 그 가지마다 작은 움틈이 보였다. 빈틈과 같이 보였던 그 공간에는 이미 새봄이 싹을 틔우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채우지 못한 시간과 해내지 못한 목표는 어쩌면 그들의 인생을 피워낼 작은 빈틈일지도 모른다. 그 빈틈은 어딘가를 향해 다시 나아가고 싶게 만드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그날의 캠프는 단순한 결과 발표회가 아니었다. 그것은 아이들이 스스로 나아가기로 한 작은 발걸음을 확인하는 자리였고, 나에게는 내가 늘 말하던 ‘과정의 소중함’을 다시금 되새기게 한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이미 나아가고 있다. 그들이 발견한 빈틈은 언젠가 더 큰 세계를 만들어낼 것이다.”
나는 오늘도 그 믿음을 품고 아이들과 함께 다음 날의 빈틈을 채워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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