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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가 지망생 Feb 14. 2016

"죽은 왕은 알에서 태어났소"

알을 품은 섬, 아홉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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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은 알에서 태어난 자요.”

  

말의 부족, 마가의 수장이 씹어뱉듯 말했다. 주위에서 찬바람이 일었고, 다들 입을 앙다물었다. 


알에서 태어난 자들, 이마가 높고 얼굴에 흉터가 있는 그들은 사람처럼 생겼고 사람의 말을 하지만,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다. 짐을 나르는 말이나 소와 마찬가지였는데, 사실 그보다 못했다. 말이나 소는 고기를 먹을 수 있지만, 알에서 태어난 자들의 고기를 먹을 수는 없다. 


아주 오래 전, 참혹한 기근이 들었을 때 누군가가 사람 고기를 먹었다고 했다. 그는 얼마 뒤 완전히 실성했고, 죽은 뒤 열어본 그의 머리통에선 구멍이 숭숭 난 골이 나왔다. 그 뒤로 이 나라에선 아무리 배가 고파도 사람 고기를 먹는 일은 없었다. 


고기를 먹을 수도 없는 짐승, 그게 알에서 태어난 자들이다.


“왕은 이마가 납작하고 얼굴이 깨끗하오. 죽은 왕을 어미의 뱃속에서 꺼낸 산파를 내가 만난 적이 있소. 어찌 존엄한 왕더러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거요.”     


얼어붙은 공기를 깬 것은 소의 부족, 우가의 수장. 역시 표정이 무거웠다.     


마가의 간이 다시 말했다.     


“물론, 그렇소. 왕은 사람의 자식이오. 그러나 결국 뱀의 부족. 


원래 이 나라는 그들의 땅이 아니었소. 이 땅이 생겨날 때부터 이곳에 터 잡고 살던 우리 조상들은 그들의 근본을 알지 못하오. 


여기 모인 다섯 부족의 조상 가운데 알에서 난 자는 없소. 말이 알을 낳는다는 이야기 들어본 적 있소? 소나 개, 고양이, 돼지가 알을 낳는 걸 본적이 있소? 


여섯 부족 가운데 유일하게 뱀의 부족만이 알을 낳는 짐승에게서 비롯됐소이다. 이 땅이 생겨나던 시절의 옛 이야기를 우리는 흔히 허황되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소. 따지고 보면 숨은 이유가 있기 마련이오. 그들이 굳이 뱀의 부족이라 불리게 된 데는 이유가 있을 게요. 


뱀은 알을 낳는 동물이오. 그들의 근본을 찾아가면, 알에서 태어난 자들과 어떻게든 관계가 있을 거요.”     


개의 부족, 구가의 간이 나섰다.     


“어제 죽은 왕은 죽은 다섯 아들의 복수를 백제에게 하려는 게 아니오. 다섯 부족에게 복수하려는 거요. 왕이 죽으며 남긴 상자를 보시오. 백제와의 전쟁에서 몸을 피했던 우리 다섯 간의 자식들의 이름이 모두 적혀 있소.”     


고양이의 부족, 묘가의 간이 말을 보탰다.     


“죽은 왕은 백제보다 우리 다섯 부족을 더 미워하오. 다만 그 속마음을 숨기고 살았을 뿐이오. 


백제와의 전쟁에서 뱀의 부족이 선봉에 서서 화살을 맞았던 것을, 그는 늘 한스러워했소. 


그러나 뱀의 부족, 사가의 무리는 이 나라에서 늘 궂은일을 도맡아 왔었소. 우리 다섯 부족의 선조들이 먼저 터 잡고 일궈 놓은 땅에, 뒤늦게 들어와 살면서 그 정도 대가는 치러야 마땅하오. 죽은 왕의 다섯 아들이 백제 군사의 화살에 죽은 것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소.    

 

죽은 왕이 보기에, 전쟁터에서 뒤로 물러난 우리 다섯 간의 자제들이 괘씸해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오. 그러나 전쟁은 이미 오래 전 일이오. 


사가의 자제들은 희생됐지만, 살아남은 사가의 무리는 전쟁 이후 훨씬 부유해졌고 사가의 간은 결국 이 나라 왕이 됐소. 한 부족의 자제들이 죽은 대신, 살아남은 다섯 간의 자제들은 이 나라의 기둥이 돼 있고, 누구 하나 제 몫을 하지 못하는 자가 없소. 


죽은 자는 얼마 되지 않은데, 살아남은 자들은 두루 잘 풀렸소. 옛 어른들 말씀에도 큰일을 위해 작은 희생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지 않았소. 이게 바로 그 경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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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알을 품은 섬'


첫 번째 이야기 :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두 번째 이야기 : "머리를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세 번째 이야기 : "활 잘 쏘는 자가 왕 노릇 하는 까닭"

네 번째 이야기 : "화살 맞아도  끄떡없으니 활쏘기란…" 

다섯 번째 이야기 : "화살이 눈에 박히자 가야 전사들은"

여섯 번째 이야기 : "그 활로 나를 쏘거라"

일곱 번째 이야기 : "그들을 나와 함께 황천으로 보내라"

여덟 번째 이야기 : 왕이 제 자식 죽인 자를 접대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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