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의 인기는 제인 오스틴 팬덤 안팎에서 절대적이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고 추천하는 작품은 <설득>이다. 그러나 한눈에 반한 작품을 묻는다면 <노생거 수도원>을 꼽겠다.
오스틴 사후 출간된 <노생거 수도원>은 실제로는 20대에 집필된 초기작이다. 후기작으로 갈수록 보수적 성향의 성찰을 드러낸 오스틴은 십 수년이란 시간차에 대해 거듭 걱정했다. <노생거 수도원>은 활기찬 화법으로 작가적 포부와 야심을 듬뿍 드러낸다. 오스틴은 그녀 세대의 지배적 장르였던 규범소설과 고딕소설 사이를 경쾌하게 오가며 특기인 아이러니를 실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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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문을 위해 간략하게 요약해보면 시골 목사의 딸 ‘캐서린 몰랜드’는 무척 평범한 소녀이다. 특별한 미모도 재능도 없지만 다복한 대가족 속에 활달하고 소탈하게 자랐다. 캐서린은 지인인 ‘앨런 부부’의 호의로 최신 유흥지인 바스 여행에 동행하게 된다. 유흥지의 흥분 속에 알게 된 젊은 신사 ‘헨리 틸니’는 시니컬한 재치로 캐서린을 사로잡는다. 역시 바스에서 알게 된 또래 ‘이사벨라 소프’는 캐서린의 들뜬 마음을 부추긴다. 대유행 중인 고딕 소설을 캐서린만큼 좋아하는 그녀는 세련되고 화사하며 무엇보다 여자들의 우정을 ‘강조’한다.
그런데 바스에서의 날들이 이어질수록 캐서린은 모든 것에 어리둥절해진다. 낭만적 기대와는 달랐던 혼잡한 무도회장처럼 새로운 친구들의 말과 행동은 종종 불일치해 그녀를 혼란에 빠뜨린다.
고딕 소설에 몰두하며 낭만을 꿈꾸던 캐서린에겐 얼마 후 진짜 사건이 생긴다. 헨리의 아버지-냉정해 보이던 ‘틸니 장군’으로부터 따뜻한 초대를 받은 것이다. 틸니 가의 본가가 어떤 곳인가? 소설 속 배경 같은 유구한 역사의 고딕 풍 ‘노생거 수도원’이 붙어 있는 곳 아닌가! 더군다나 사별했다는 틸니 장군의 부인에 관해 헨리도, 그의 우아한 동생 ‘엘레노어’도 모호하게만 얼버무렸다.
틸니 가에서의 첫날밤, 날씨마저 폭풍이 몰아친다. 황량하게 넓은 방의 고가구에서 캐서린은 의문의 종이뭉치를 발견하고야 만다. 지금 이 밤이 모험의 시작인 걸까? 캐서린이 만나게 되는 것은 푸른 수염의 전 부인일까? 다락방의 미친 여자일까?
18세기를 강타한 계몽주의는 프랑스 대혁명으로 발화되었다. 계급 변동에 대한 불안과 철학적 성찰에 대한 피로감은 과도한 감상성의 낭만주의를 유행시켰다. 이전 세대의 유산인 합리적 이성에서 발전된 ‘규범소설’이 계급 지침서로 권장되었다면 낭만성이 장르화 된 ‘고딕소설’은 쾌락적 독서로 인기몰이를 한다.
“당신은 수도원에 엄청난 호감을 갖고 있군요.”
“그건 분명해요. 책에서 읽은 것처럼 오래되고 멋진 곳 아닌가요?”
“그렇다면 ‘책에서 읽은’ 그런 건물에서 풍기는 모든 공포와 맞설 준비가 되어있나요? 심장은 튼튼한가요? 스르르 열리는 판자나 태피스트리를 보고 기절하는 건 아니죠?”
헨리는 인기 고딕 호러 <우돌포의 미스터리> 플롯을 차용해 캐서린의 감상성을 놀린다. 제인 오스틴 세대에 유행한 ‘고딕 호러’는 외형적인 공통점이 있다. 중세의 음침한 감상성이 기반이기에 지하실, 다락, 감옥이 구비된 스산하고 오래된 건축물이 등장한다. 인물들 또한 피폐성이 강조되어 과거에 사로잡힌 강박적인 여주인공, 악마적 매력을 지닌 악당의 모호한 애정이 감정선을 이끌어간다. 무엇보다 사회적 모럴에 반하는 바운더리-사랑의 도피를 감행한 연인, 중혼, 사생아, 감금된 미친 여성, 저주와 주술 같은 쾌락적 소재를 써먹기 위해 유령이나 미스터리라는 초자연적 요소들이 동원된다. 사회적 규범에서 용인될 수 없던 갖가지 막장성을 모두 떠넘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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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캐서린 몰랜드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녀가 여주인공이 될 운명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으리라. 타고난 신분이며,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인물들, 그녀 자신의 성격과 기질까지 모든 게 하나 같이 소설 속 여주인공과는 정반대였다.
<오만과 편견>에서 그 유명한 첫 문장으로 구현된 아이러니는 <노생거 수도원>에선 캐릭터로 조성된다. 캐서린이 여주인공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오스틴의 선포는 이 작품의 목소리에 대한 힌트다. 고딕 장르의 여주인공과 달리 캐서린은 몸과 마음이 완전 건강하다. 사회적 지표에 맞추기 위해 자신의 취향을 부정하거나 허세를 부리지도 않는다. 그런 올곧음은 감상성에까지 충실해 여주인공답지 않게 흑역사를 만들고 만다. 물론 기존의 여주인공처럼 반성하지만 그 성찰은 규범적 강제가 아닌 자신만의 모험으로 쟁취한다.
오스틴의 캐서린처럼 ‘별다른 배경은 없지만 특유의 개성으로 상위 계층 진입에 성공한 여주인공’은 현재도 클리셰다. 그러나 이런 전형성은 제인 오스틴 시대를 한참 지난 후의 여성상이다. 근대까지도 이상적 여주인공은 보호되고, 쓰러지고, 고난 속에 현숙을 요구받는 수동적 존재로 대상화되었다. 낭만적 감상주의에서 발현된 고딕소설 주인공들은 정점을 달린다. (정신 차리는 화장수를 끼고 자기 연민과 비탄에 빠진 드라마 퀸을 떠올려 보라!) 우리가 21세기의 독자기에 익숙할 뿐 당대의 지배적 장르를 놀리는 글을 쓰고 읽는 것은 이미 전통성에 대한 도발이었다.
고딕 호러를 통한 오스틴의 현실 풍자는 로맨스에 그치지 않았다. 당시의 ‘중세풍’은 관념적 가치뿐 아니라 실제 하는 물성에도 영향을 끼쳤다. 레트로란 명칭으로 과대 포장된 지난 세대의 유행처럼 중세 건축물을 모방한 가짜 건축물이 다수 유행했다. 캐서린이 ‘노생거 수도원’의 정통성에 집착하면서도 명소로 오해된 가짜 유적 ‘블레이즈 성’에 가고 싶어 하는 것은 소비적 유행과 선망을 은유한다. 현재의 우리가 ‘힙스터’라는 조어에 가지는 양가감정처럼 오스틴은 본질이 아닌 외형적 편견에 휘둘리는 감상성을 놀리고 있다.
“제가 판단하기로, 여성들이 쓰는 일반적인 편지 문체는 단 세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 별로 흠잡을 데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게 뭐죠?”
“일반적인 주제의 결핍, 문장부호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 그리고 아주 빈번하게 나타나는 문법의 오류.”
“세상에! 그런 칭찬은 거절하는 게 맞겠네요. 당신은 그런 점에서 우리 여자들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군요.”
“..취향이 바탕을 이루는 재능들의 경우, 어느 쪽이 탁월한가는 남녀 사이에 꽤 분명하게 나누어져 있습니다.”
당시 고급 교양에 속하지 못한 장르인 ‘소설’에 대한 캐서린의 덕심을 헨리는 반어법을 통해 놀리고 있다. 장난처럼 굴지만 여성의 글쓰기, 궁극적으로는 여성의 교양을 대놓고 폄하한다. <오만과 편견>에서 다아시의 의견과도 유사한 맥락이다.
18세기 신생 장르인 소설은 등장 당시 사상 철학서에 비해 한 급 떨어지는 취급을 받았다. 감성에 기반한 사적인 글쓰기는 독자뿐 아니라 작가로서의 여성군을 대거 발현시켰다. 자립적 글쓰기의 시대가 열리고 가사노동 외의 중심에 여성이 서자 소설은 더욱 폄하된다. 책을 읽고 구매하는 비율을 채우는 것은 압도적으로 여성이지만 미디어에 노출되는 작가는 대부분 남성인 현재와 다르지 않다.
소설의 여주인공이 다른 소설의 여주인공에게서 후원받지 못한다면, 대체 어디서 지지와 보호를 받을 수 있을까?
우리 소설가들은 서로를 저버리지 말자. 우리는 이미 상처받은 몸이다. 우리가 생산하는 작품은 세상의 어떤 문예 활동보다 더 폭넓고 진솔한 기쁨을 제공해 주지만, 어떤 종류의 글쓰기도 이렇게 비난받은 적이 없었다.
<노생거 수도원>의 화자인 ‘전지적 작가’는 다른 작품에 비해 종종 적극적으로 발언권을 행사한다. 제인 오스틴은 소설로 대변되는 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부당한 폄하를 일갈한다. 문학 앞에 반드시 언급되어야 하는 건 성별이 아닌 목소리이며 그것이 글을 쓰는 이유임을 성토한다.
호감 표시마저 반드시 남성이 주도하는 것이 정상인 시대에 자기감정에 솔직한 캐서린은 대놓고 헨리를 쫓아다닌다. 규범에 연연치 않음으로써 캐서린은 주인공의 차별점을 획득한다. 반면 헨리의 여동생 엘레노어는 전통적 규범에 완벽히 부합하는 기준을 보여준다. 그 기준에는 제도권 이탈에 대한 두려움도 포함된다. 보이는 것보다 절박한 위치의 이사벨라는 엘레노어의 계급을 선망하고 적극적으로 계급 상승을 도모한다.
‘제법 예쁜 편’이라는 말은 요람에서부터 예뻤던 사람에게 보다는 인생의 15년을 평범한 외모로 살아온 아가씨에게 훨씬 더 커다란 즐거움을 안겨주는 법이다.
캐서린이 자신의 평범성을 극복할 드라마 퀸을 갈망한다면 이사벨라는 드라마퀸적 과시로 자신의 약점을 은폐한다. 이사벨라는 사회적 화법에 서투른 캐서린을 어장관리를 위한 도구로 써먹으려 든다. 캐서린은 어리지만 어리석진 않기에 이사벨라가 주장하는 일방성에 의문을 품게 된다.
“어느 쪽으로 갔어?”
이사벨라가 황급히 몸을 돌리며 물었다.
“그중 한 남자*는 상당히 잘생겼던데.”
“교회 마당 쪽으로 갔어.”
“뭐, 남자들에게서 벗어나 얼마나 좋은 지 모르겠다!”
(*이사벨라는 처지를 떠나 관심종자기도 한 것이 생면부지 남성의 시선을 유도하던 중이다. 실패 후 여우의 신포도 마냥 수습하는 장면. 그래도 스치는 순간 외모 스캔하는 순발력이라니..!)
“..우리 생각이 그렇게 똑같다니 웃겼어! 서로 다른 점이 하나도 없다니까.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너한테 이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넌 정말 앙큼해! 이걸 갖고 틀림없이 날 놀릴 거야.”
“아니야, 절대 그렇지 않아.”
“오, 아니야. 넌 분명히 그럴 거야. 너보다 내가 널 더 잘 알아. 우리 두 사람**이 서로를 위해 태어난 사람 같다느니,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 거라고. 그래서 날 엄청 난처하게 만들겠지. 내 뺨은 장미처럼 빨개질 테고 말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너한테 말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정말로 넌 날 잘못 생각하고 있어. 난 어떤 이유로든 그렇게 부적절한 말은 하지 않을 거야.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할 거라고.”
이사벨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씽긋 웃더니, 저녁 내내 제임스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사벨라 본인과 그녀가 어장관리 중인 캐서린의 오빠 제임스)
종종 개입하는 화자처럼 <노생거 수도원> 속 인물들은 모두 중의나 함의를 애용한다. 캐서린은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 유일한 인물이기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인내심이 바닥난 이사벨라가 아예 대본을 써주는데도 캐서린의 순수함은 요지부동인 데다 진심이기까지 하다. 캐서린이 이사벨라의 악용을 피해 갈 수 있었던 것은 그녀 자신의 충실함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방식의 미덕은 오스틴이 속한 당시 ‘젠트리’ 계층의 대표적 가치였다.
헨리는 재치를 가장해 약점은 얼버무리고 냉소를 합리화한다. 스스로의 모순을 지적 허영으로 교묘히 포장하고 은폐한다. 얼핏 세련된 사교 화법 혹은 로코식 핑퐁 클리셰 같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보면 그의 불안정하고 공고한 성격이 드러난다.
이사벨라는 훨씬 더 동물적이다. 이사벨라의 ‘답정너’ 화법은 헨리의 기교에 비해 하수지만 그래서 더 공격적이다. 이사벨라에겐 수치심이 없다! 전력을 다하는 그녀는 읽는 내가 수치스러워진다. 이사벨라가 헨리보다 멍청해서? 둘의 기교는 성별로 인해 갈라진다. 베넷 가의 다섯 딸처럼 재산도 없고, 재능과 계급마저 변변찮은 독신 여성에게 결혼만이 구원인 시대였다. 같은 처지임에도 이사벨라의 오빠 ‘존’은 가스라이팅에 가까운 언어폭력과 기만에 서슴없다. 하지만 여성인 이사벨라는 누구에게나! 호감이어야만 한다.
여성 독자들은 이사벨라에게 동의도 호감도 가질 수 없지만 비난도 쉽지 않다. 헨리가 장난과 훈계질에 써먹은 ‘반어법’이 이사벨라에겐 생존의 문제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몰랜드 양, 당신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의혹을 품었는지 잘 생각해 봐요.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판단을 내린거죠? 우리가 어떤 시대에, 어떤 나라에 살고 있는지 기억하세요.
..친애하는 몰랜드 양,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겁니까?”
캐서린의 감상성은 노생거 수도원에 도착해 절정에 이른다. 바스의 캐서린이 혼란에 빠졌다면 노생거에선 내내 불안에 시달린다. 미숙한 사회 경험과 어린 나이 탓에 또렷하게 설명하지 못하지만 캐서린이 느끼는 불안은 ‘틸니 장군’으로 대표되는 가부장적 폭력에 대한 직관이다.
무사히 해피엔딩을 획득하지만 이 커플의 전망은 정말 낙관적일까? 약간의 깨달음과 온건한 애정에도 헨리는 결국 아버지의 길을 따를 것이고 캐서린도 온건히 순종할 부인 쪽에 가까워 보인다. 이런 계급적 구분은 여성에게 새로운 공포가 아닌 ‘다음 차례의 공포’ 일뿐이다.
브론테의 거부감을 약간은 이해하는 게 제인 오스틴은 문학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언제나 거리를 두고 있다. 주체에 필요 이상 이입하지 않고 관찰자의 화법을 구사한다. 가부장 혹은 사회적 바운더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깨우침과 별개라는 회의적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브론테가 다락방에 갇혀 포효하게 될까 발버둥 쳤듯 오스틴은 언제나 여성성을 주시하는 지하실의 어둠을 의식하고 있었다.
사랑을 통한 변혁이 불가능한 세상의 해피엔딩은 그 자체가 냉소이며 위로였다. 자신이 구축한 세계 안에서나마 선사하고자 한 일종의 판타지적 보상이다. 많은 여성들이 로맨스를 꿈꾸면서도 현실이 꽃과 키스로만 채워지지 않음을 알고 있는 것처럼.
<노생거 수도원>은 밑그림 같은 함의를 찾아보면 더욱 재미있는 작품이다. 제인 오스틴의 필모 중 가장 또렷한 페미니즘적 통찰을 드러내지만 발랄하고 경쾌하다. 고딕 호러로서 <폭풍의 언덕>을 사랑하고, 대프니 듀 모리에와 셜리 잭슨을 상단에 품은 독자라면 이 경쾌한 까칠함에 반드시 끌리리라 확신한다.
@출처 및 인용/
Northanger Abbey, Jane Austine, 1818, 일러스트 휴 톰슨 Hugh Thomson
시공사 제인 오스틴 전집; 노생거 수도원 (시공사, 2016, 번역 이미경)
여자가 쓴 괴물들, 리사 크뢰거 & 멜라니 R. 앤더슨 (구픽, 2021, 번역 안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