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가 찍고 쓰는 단편영화이야기
이 영화의 첫 제목은,
달팽이였다.
최종본에 아홉수로 바뀌었지만.
아마도 감독은
스물아홉 취준생 혜진이
달팽이처럼 느리지만
제 길을 찾아가는 청춘의 모습을
담고 싶어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런 딸 혜진을 지켜보며 응원하는
엄마였다.
대본리딩
이 영화는
스물아홉 취준생 혜진이
면접을 본 날부터
불합격 통보를 받고도
엄마에게는 차마 털어놓지 못하던
그 여러 날을 담은
아홉수에 관한 이야기다.
딸은 궁금했다.
엄마는 내 나이 때 뭘 했을까.
자신처럼 답답했을까.
아니면....
되돌아온 답은
'널 낳았지'
미처 몰랐던
엄마의 스물아홉 시절까지
전해 듣는다.
씬 5의 대본을 들여다보자.
#5. 카페 / D
혜진과 엄마는 카페에 앉아있다.
혜진 (커피를 마시고) 엄마 거보다 맛있는데?
엄마 얘는 요리도 하면서 입맛이 형편없냐?
(커피를 마신다)
혜진 어우, 농담이야 농담.
엄마 맛있긴 하네. 커피 뭐 쓴 거지?
혜진 근데, 갑자기 왜 왔어?
엄마 밥은 잘 챙겨 먹어?
혜진 나이가 몇 살인데. 밥은 먹지.
엄마 결과 발표는?
혜진 아직 안 나왔어.
혜진은 무심한 듯 디저트를 먹는다.
엄마 눈에는 혜진의 표정이 좋지 않다.
엄마 (측은한 표정으로) 너무 신경 쓰지는 마.
혜진 (입가를 닦으며)
엄마는 처음부터 카페 한 거야?
내 나이 때 뭐 했어?
엄마 스물아홉이면... 너 낳았지.
그전엔 노래한다고 밴드연습하고 그랬는데.
혜진 그래? 노래 좀 했나 보네?
엄마 그냥 하고만 싶었던 거야.
기타는 늘지도 않더라. (커피를 마신다)
혜진 가만 보면 어른들은 대단해.
그 나이에 가정도 꾸리고, 돈도 벌고.
난 아직 애 같은데.
엄마 예전이나 그랬지.
요즘은 너도 젊은 거야.
혜진 근데 다들 나보다 어른 같고
잘 나가더라.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본다.
한숨을 쉬는 혜진.
엄마 땅 꺼지겠다.
혜진 난 뭐 해 먹고살지?
이게 맞나 싶기도 하고.
엄마 하고 싶은 거 해.
혜진하고 싶은 게 딱히 없는 것 같아.
엄마 너 재밌어하는 건 있잖아.
혜진 재밌는 건 있긴 하지.
엄마 재밌는 거 해.
나는 직업은 평생 가니까
무조건 본인이 재밌어야 된다고 봐.
혜진 그런가.
<#5 대본 중에서>
이번에도 떨어졌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서른을 코앞에 둔 나이.
속상해할 엄마까지 어찌 감당하랴.
'어른들은 대단해'라는
혜진의 말속에는
엄마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담겼다.
이 대사를 곱씹으며,
나는 나의 어머니를 생각했다.
나도 역시 그런 생각을 한다.
스물아홉이 아니라
쉰아홉을 겨우 두 해 남겨 둔
지금 이 나이에도 문득문득.
지금 내 나이 때 나의 엄마도
지금의 나와 같았을까.
곱씹을수록
참 대단하셨네 우리 엄마.
2021년도 5월 29일.
이 영화를 찍은 지
벌써 3년.
연기를 시작하고 출연한
두 번째 단편영화다.
첫 번째 영화의 촬영일이
같은 해 5월 8일 어버이날이었으니.
아무래도
엄마라는 배역과 인연이 깊은가 보다.
한번 봐줄래?
궁금했다 어떻게 볼지.
오랜 지인이 이 영화를 보고
나에게 해준 얘기는 이거였다.
'누나는 눈빛이 너무 맑아.
엄마들은 안 그래'
그럴지도,
난 엄마가 되어 본 적이 없으니까.
엄마의 눈빛은 어떨까.
결혼을 하고 남편이 되고
아빠가 된 녀석이 해 준 말이니
더구나 영상쟁이니 허투루 한 말은
아닐 거고.. 그리 듣고 보아하지
또 그런 듯도 싶다.
엄마역을 할 때마다
후배 녀석의 그 말을 떠올린다.
여전히 나에게는 숙제다.
열아홉, 스물아홉,
서른아홉, 마흔아홉.
어찌어찌
지나갔다.
이제
쉰아홉. 예순아홉....
어디 나뿐이랴
헉헉대며
지나야 할 인생의 아홉수는
혜진에게도
혜진의 엄마에게도
여전히 남아있다.
결국에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떨리는 목소리로 전하던
불합격 소식.
그걸 보면서
재밌는 거 해봐.
하던 엄마인 나의 말을 떠올려 주길.
재미있어하던
요리를 혜진이 다시 시작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한다.
감독은 그런 바람을 갖도록
영화 내내 심어 놓았다.
혜진의 휴대폰 속 음식 사진,
책꽂이 사이사이 놓인 요리책.
감독은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나 보다.
느리더라도
힘을 내서 가자고.
처음 이 영화의
제목이 달팽이였던 것처럼.
그래서 결국엔 제목으로 정한
'아홉수'를 건너가자고.
오랜만에 노트북 폴더 안에 잠들어 있던
이 영화를 깨우니 짐짓 나에게도 말을 건다.
느리더라도 마침내는
넘어갑니다, 모든 아홉수.
아홉수 (Fiction/Color/12'13"/2021)
각본/연출: 유정명
출연: 이은송, 구가람, 장마레, 이예린
같이 만든 사람들: 김옥건, 송경현, 김철진, 우희용, 유인성, 황혜영
달팽이 같은
끈기로
모든 아홉수를 가뿐히 넘어가실
유정명감독의
영화로운 시절을
응원합니다.
'100명의 마레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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