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다니던 평범한 사람이 어느 날 성희롱을 당해요. 원래 음담패설이 잦은 건 알고 있었어요. 불쾌했지만 자신의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려니 했죠. 그런데 그게 잘못됐나 봐요. 어느 날 직원 중 한 명이 그의 엉덩이를 만졌어요. 너무 놀라서 화를 냈더니 지나가다 부딪힌 건데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구냐고 소리치더라고요. 불편해서 같이 일을 하겠냐고. 적반하장이 따로 없었죠. 황당함에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일을 하고 있더라고요. 만진 것이 분명했지만 증거가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어요. 다음부터 조심하라고 말하며 넘어갔어요. 지나가다 부딪힌 거라는데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어요. ‘이곳에 내 편은 없구나.’ ‘이런 일을 안 당하려면 내가 조심해야 하는구나.’ 그렇게만 생각했죠. 그때부터 노골적인 성희롱이 시작됐어요. 그가 보이는 곳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음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더니 실수를 가장한 신체 접촉도 잦아지기 시작했어요.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인사과에라도 사실을 알리고 싶었지만 영원이 꼬리표가 남게 되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이직도 마찬가지고요. 주변 누구에게 속 시원히 터놓을 수도 없었어요. 지방에 계신 부모님에게는 더더욱이요. 서울에서 나름 큰 회사에 들어갔다고 동네에 어찌나 자랑을 하셨는데요. 며칠에 한 번씩 전화를 해서는 자식 걱정만 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말을 할 수 있겠어요. 자식은 부모의 기대를 먹고사는 존재잖아요. 그렇게 꿋꿋이 버티다 결국 회사를 그만두게 돼요.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셨거든요. 버텨야 할 이유가 사라진 거죠.
들고 있던 음료수가 뿌옇게 보였다. 라벨은 갈래갈래 찢겨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점원은 바닥을 뒹구는 라벨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의 표정 없는 얼굴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마를 매만지며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야기가 많이 후지죠?
후지다니요.
분위기를 전환시키려던 나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점원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무언가 하고픈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지내요?
저요?
아니요. 소설에 나오는 그 주인공이요.
점원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연민인지 동정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소설의 진위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비극적인 이야기의 끝이 그렇듯이 자살을 결심해요. 세상을 살아갈 이유가 사라진 사람에게 어울리는 결말이죠. 하지만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했어요. 죽을 용기도 없는 한심한 사람이더라고요. 뛰어내리려고 다리 위에 섰는데 너무 무서운 거 있죠? 몇 시간을 주저앉아 펑펑 울다 돌아갔어요. 그리고 지금은 조그마한 원룸에서 하루를 보내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요. 죽을 용기가 없으니 죽어가는 수밖에요.
나는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답답한 마음이 뻥 뚫려 시원한 바람이 드나드는 것 같았다. 점원은 단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 큰 위로가 됐다.
나쁜 선택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용기가 없었을 뿐이에요.
주인공은 계속 혼자 지내는 거예요?
아마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전 해피엔딩이 좋은데.
어떤 결말이 해피엔딩인데요?
죽지 않고 잘 사는 거요?
잘 사는 건 어떤 건데요?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지내는 거요.
하고 싶은 거라…….
햇살 좋은 날 카페에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주위에 누가 있든지 아랑곳하지 않고 커피를 마시는 모습. 혼자서는 시도할 수 없는 일탈이자 도전이었다.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무 평범한 일이에요.
비범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그게 살 이유가 될까요?
사는데 이유가 필요한가요.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면서 행복하게 지내면 된다고 생각해요.
반박하고 싶지만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맞다. 맞는 말이다. 나의 일상은 감정이 없는 나날들의 반복이었다. 텔레비전의 예능 따위로 웃음을 터뜨리곤 하지만 순간일 뿐, 삶의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채널의 바뀜에 따라 사라지는 것이었다. 스스로도 지금의 삶이 불안정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혼자 힘들어하지 마요.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눈앞이 뿌예졌다. 황급히 눈썹을 매만졌지만 손 밑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원은 고개를 위로하며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목례를 하고는 집으로 향했다.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목구멍에 무언가가 꽉 막혀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도착한 집에서 나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꿋꿋이 버티기만 했던 나 자신에 대한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엉엉 소리를 냈다. 그렇게 아이처럼 몇 시간을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나는 자정이 넘은 시간 편의점에 도착했다. 하지만 들어가지 못하고 삼십 분이 넘게 입구만 서성였다. 어제의 기억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마지막에 울지만 않았어도 자신 있게 들어갔을 텐데 라는 후회만 가득했다. 들어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고민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할 수도, 음식만 사서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점원은 들어온 물건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며 돌아섰다. 그리고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가게에 들어서니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하지만 여기서 돌아선다면 천추의 한이 될 것 같았다. 이건 사소하지만 나에겐 큰 도약이었다. 나는 떨어지지 않으려 애쓰는 발을 옮기며 점원에게 향했다. 점원은 내가 들어온 것도 모른 채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다.
저기…….
점원의 얼굴에서는 반가움이 가득했다. 나는 그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아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음료수…….
네?
어제 주신 음료수를 받으러 왔어요.
나는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한 몇 분 전의 나를 욕하며 혀를 깨물었다. 이대로 있는 힘껏 혀를 깨문다면 과다출혈로 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망상마저 떠올랐다. 창피함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나는 뒷목이 뻐근할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바랐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고개를 드니 점원이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그 모습이 눈이 부셔 발갛던 얼굴이 빨갛게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