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대환장
계약은 약속이다. 약속의 완료는 약속한 물건을 보내고, 약속한 대금을 받고 약속한 대로 물건에 문제가 없으면 된다. 모든 상거래에서 '신의칙'이라고 불리는 신의성실의 원칙(Utmost good faith)이 중요한 이유다. 그러나 세상은 교과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상황이 발생하면 머리를 굴리고, 나름의 묘수라 생각하는 대책과 꼼수를 부린다.
얼마 전 구매부서에서 업체 사장님한테 "사장님 우리 nego 좀 해주셔야겠어요? 내일 오실 수 있죠"라고 여쭈었더니, "그래, 내가 그렇지 않아도 찾아갈라고 했는데 내일 바로 갈게"하신다고 전달해 줬다. 다음날 3%나 오른 견적서를 갖고 오셨다고 구매팀장이 불을 뿜었다. "아니 깎아달라고 했는데 올려서 오시는 분이 어디 있어요?"라며 하소여을 한다. 우문현답과 같은 상황이라 웃음이 났다.
대화를 잘 돌아보면 "Nego=Negotiation=협상"을 하자고 했지 내려달라고 한 적은 없다. 그럼 "깎아주세요"라고 요청했어야 한다. 나의 해석은 타인의 해석과 같다는 근거 없는 생각이 멘털붕괴를 부른 것이다. 그리고 결과가 기대와 다르면 동문서답을 했다고 우기기는 것과 다름없다. 이런 해석을 붙이면, 지금 제정신이냐고 타박을 한다. 해석을 해도 난리다.
제품 출하가 고객 승인 지체로 지연됐다. 문제는 오늘이 말일이고 회계 마감 기준일이다. 미국에 연락을 했더니, 담당자가 "빠르게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와 같은 도움 안 되는 답변이 왔다. 전화를 들고 "알았어, 어차피 이달에는 못 나가는데 내일 사장님 집 주소로 보낼 테니까 준비하고 있어"라고 했더니 한 시간 안에 정리하겠다고 회신이 왔다. 사정도 있고, 이유도 있지만 가끔 동문서답은 대환장과 빠른 해결이란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든다.
어떤 고객은 입금이 늦다. 입금이 늦으면 사람은 불안해지기 마련이다. 대금 지급을 이야기를 했더니 외국 양반의 동문서답이 시작됐다. "내 손자가 24살이야" "아 그러시군요 그런데 지금 그 이야기가 무슨 연관이 있나요?" "잘 들어봐, 얘가 대학에 다녀, 그리고 일 년에 학비가 9만 2 천불이 들어간다니까"라는 대답을 듣자마자 웃음이 난다. '아하! 나도 뭔 말인지, 무엇을 하고 계신지 잘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라는 시그널이 온다.
며칠 늦게 보내서 미안하다, 며칠 뒤에 보낼게 하면 되는데 이런 방식으로 나오면 조심스럽다. 잠깐 흥분해서 잘못된 대응이 큰 낭패를 만들 수 있다. 사람은 다양하고 그 사람들의 마음도 변화무쌍이다. 의도는 알겠지만 자꾸 웃음이 났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 익숙한 방식이란 생각 때문이다. 마치 나이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속상해서 "내가 죽어야지"라는 감탄사와 비슷한데, 이것을 외국 어르신이 하시니 더 당황스러웠던 것 같다. 동문서답은 만국 공통어인지 공통 화법인지 그렇다. 예전 거래가 끊긴 고객을 인수인계받았는데, 현지 시각 새벽 두 시가 되면 술을 많이 드시고 국제전화로 주정을 하시는 분이 계셔서 고생한 생각이 났다.
다른 나라 고객과 제품을 사고팔면 공급계약이란 걸 한다. 그런데 자기가 사업을 키우기 위해서 펀딩을 한다고 서류를 보낼 계획이라고 했다. 잘해서 사업을 키워달라고 부탁했다. 몇 일 뒤 NDA를 체결하면 추가 자금 확보에 큰 도움이 된다고 연락이 왔다. 서류를 보내시라고 해서 보고 한참 웃었다. 비밀유지 협약에 공급계약에 있는 보증기간보다 1년을 늘린다는 조항이 있다. "고객님 비밀유지 협약하고 보증기간 연장하고 대체 무슨 상관이 있나요?"라고 문의를 하니 "내가 펀딩을 받는 게 중요하지 않겠니?"라는 답이 왔다. 말은 되는 것 같은데, 이것은 무슨 논리일까? 상식적이지 않고 모르는 일에는 도장을 안 찍는 것이 핵심이다.
최근 코로나로 각 나라가 요란한데 우리나라에 격리 면제 프로그램이 있다. 무조건 오겠다는 외국 양반 때문에 우여곡절을 겪었다. 온갖 서류에 신청자 서명, 보증인 서명을 해야 한다. 고객 서류를 모두 접수했는데 뭔가 좀 이상하다. 천천히 보니 여권에 있는 싸인과 서류에 있는 싸인이 다르다. 서류 서명이 다르다고 문의를 했더니 "어~ 그거 내가 급해서 아들 시켰는데, 안되나?"라는 회신이 온다. 나라님 서류에 제각각인 서명을 넣으면 회사도 문제다. 얼떨결에 보증인이 된 나는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고 잔소리를 했다.
게다가 접수하자마자 승인 거부 문자와 수정 요청 전화가 온다. 공무원들 참 부지런하다고 생각했다. 다시 수정해서 보내면 이번에 다른 요청을 하며 승인 거부를 날린다. 문의를 위해서 전화를 했더니 소리샘으로 넘어간다. 연락이 안 되고 업체 미팅을 하는데 모르는 전화가 온다. "제가 지금 미팅 중인데요, 어떤 용건인가요?"라고 문의했다. "서류를 보니까 00 서류에 직인이 빠진 거 같아요?"라고 해서 "그것만 하면 되죠?", "그것만 하면 돼요, 수정해주세요"라는 친절한 답변을 듣고 수정했더니, 바로 승인 거부 문자가 또 온다. 계속 한 페이지씩 보며 이것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분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문자는 보증인에게만 온다. 문자가 올 때마다 나는 담당 직원에게 보고를 계속해야 한다.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친절한 녀석이 회사 전화가 아니라 내 핸드폰 전화번호로 등록했다고 한다.
밥벌이 현장에서 나오는 동문서답은 더 많다. "이거 언제까지 할 거야?"라고 물어보면 "그게 말이죠 ~~"라고 시작하는 블라블라한 사정이 나온다. "그러니까 언제까지 할 거야?" "그러니까요~~"로 이어지는 블라블라가 계속된다. "그러니까 대체 언제 할 거야?"라고 다시 물어보면 "제가 말씀드렸잖아요?"라고 대답한다. 적막강산이 흐르는 동안 내가 대체 뭘 잘못 물어봤나 한참 생각하게 된다. 내가 질문을 잘 못한다는 심각한 회의감이 든다.
"이걸 이렇게 처리하면 문제가 발행하는데?! 지난번에 이야기한 방식으로 처리하면 괜찮지 않겠어?"라고 이야기하면 "그게요, 사정이 있다니까요?"라는 답변이 나온다. "무슨 사정?"하고 되물으면 "그러니까 제가 지난번에 그렇게 했잖아요. 그런데 그걸 하다 보니까, 엄청 오래 걸리더라고요. 그걸 좀 개선하려다 보니 시간은 없고, 마무리는 해야 하니 제가 하던 방식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니까요"라는 답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문제를 만들고 있으니, 갑자기 고구마 몇 개 꿀꺽한 것 같다.
"그래서 이번에 B방식을 선택했잖아요? 아니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려는 거예요?"라고 물어보면 "아휴 답답해라, 그러니까 제가 이유가 있어서.... 블라블라"하며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기생충 영화의 명대사처럼 "아들아 너도 계획이 있구나"라는 말이 생각난다. 차라리 '못하겠다', '할 줄 모른다', '대신해주세요'라고 답을 했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이것은 무슨 계획일까? 횡설수설을 듣다 보면 머리가 아프다. 왜냐하면 적정한 선을 넘으면 서로 강경해지기 때문이다. 쌩떼를 만나면 제일 힘든 이유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참으면 단계가 올라가면 힘든 일도 시연하며 알려줘야 한다는 점이다. 화병이 생기는 이유다.
하루는 직원 한 명이 회사에 오지 않았다. 어디 아픈가 걱정이 돼서 "여보세요? 너 어디 아파서 회사를 안 온 거야? 별일 없어?"라고 물어봤더니 "하하하하, 저 연찬 데요?"라는 대답이 온다. "연차? 그래... 그런데 내가 연차 결제를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라고 대답했다. 나도 착각을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 녀석, 남자가 아니라 천만다행이다. "하하하 그러니까 내일 올리려고요" "뭐라고????" 이해가 되는 사정은 있지만, 이런 대화는 정말 두통거리다. 출근만 해봐라 남녀평등하게 족쳐야 하지 않겠어라는 상상을 했었다. 생각지도 않은 미래형 동문서답이라 황당한데 참신했다. 생각지도 못한 답이다.
나이가 많으신 분들이 연륜을 얹은 동문서답은 최고봉이다. "이 번 건은 많이 다르게 처리된 것 같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죠?"라고 물어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다.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그런데 답변이 "어휴, 내가 죽일 놈이야 내가"라고 한탄을 시작하신다. 뭐라 말을 붙일 수도 없다. 그냥 내가 억울하게 처리하는 거지. 그 더 나쁜 대답 중 하나가 "내가 형이다"라로 시작되는 하소연과 잔소리다.
내가 들어 본 역대 최고의 동문서답은 경영보고서가 잘못되어 대표이사가 CFO에게 엄청 잔소리를 했다. 조금 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대표이사가 보고서 내용을 확인하며 맞냐 틀리냐를 확인하며 분노의 질문을 했다. 생각지도 못한 CFO의 대답 때문에 웃음을 참느라 고생했다. "보고서를 이렇게 하면 어떻게 해"라는 말에 "그러게 말입니다"라는 답변 때문이었다. 올해의 우문현답이다.
나도 동문서답을 할 때가 있다. 과거에 자신의 주장이 맞다고 우기는 상사의 의견이 정당하지도 옳지도 못하다고 생각하는 중에 갑자기 훅 들어온 질문은 정말 당황스러웠다. "맞아 틀려?"를 외치는 성깔 있는 직속상관이 밉지만 동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의견 충돌이 싫어서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잘 넘어가는 중에 옆 자리 팀장 웃음이 터져서, 그날 아주 경을 친 것 같다. 나랑은 잘 안 맞나 보다.
청춘 직원 질문에 심통이 나면 나도 나름 신경 써서 답변을 한다. "본부장님 그러니까 이 제품은 가격이 엄청나게 싸야 제가 매출을 팍팍 올릴 수 있다니까요?"라고 MZ세대가 잔소리를 한다. "그래, 가격이 그 정도면 많이 팔 수 있단 말이지?"라고 물어봤다. "그럼요 그걸 말씀이라고 하세요!"라는 대답을 듣자마자 우리 집 아이들 농담이 생각났다. "너 얼른 사표 쓰고 네가 말한 가격에 제품 파는 회사에 취직해서 원 없이 엄청 싼 제품을 열심히 팔아보는 건 어떠니?"라고 말했더니 적막강산이 흐른다. 이게 끝이 아니라 볼 때마다 본부장이 나를 괄시한다고 타박을 한다.
감수성 떨어지고, 공감대 안 간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동문서답이 아니라 본인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논리적으로 이야기해 줬다고 생각하지만 그 이후엔 인간미가 떨어진다, 공감지수 빵점이란 소리를 면하기 힘들다. 사람이 어찌 그러냐고 입이 댓 발 나와서 종일 구시렁거리는 것을 보면 왜 난 효과가 없는 거지? 이런 걸 보면 결혼해서 모시고 계신 주인님의 위대함에 감사해야겠다.
동문서답 더욱 열공해야 하나? 배우는데 나이가 뭣이 중하냐? 흰머리가 대폭 늘어난 원인 중 하나가 이런 동문서답의 영향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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