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분이 저의 심리카페에 왔었습니다. 이 여자분의 모습은 섬세한 성격의 사람들이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만들어줬었습니다.
그녀는 연애와 관계가 어렵습니다.
그녀의 첫 번째 결혼은 부모님에게서 벗어나고 싶어서 저지른 탈출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탈출로 생각한 결혼은 몇 개월 지나지 않고 끝나버렸죠.
그녀의 두 번째 결혼은 함께이면서 혼자라는 서글픔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아서 내린 선택이었죠. 하지만 가정적이라고 생각했던 남자도 그녀에게 혼자란 서글픔을 느끼게 했었죠.
결국 두 번째 결혼도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끝내게 되었습니다.
그녀에 대해 잘 모르고, 조심성 없는 사람들은 쉽게 그녀를 충동적이다거나 괄괄하다거나 자기중심적이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녀를 그렇다고 말해버리기에는 그렇지 않은 모습이 더 많으니까요.
그녀는 어린 시절, 너무도 정서적으로 단절되고 답답한 시간을 보내야 했었고, 근사한 모습이고자 하는 사람이 보여주는 모습은 그녀로 하여금 상대가 가지고 있는 성향과 성격을 파악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섬세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너무도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보금자리를 바라는 마음이 컸기에 더 그런 몸부림과 같은 선택들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그녀는 첫 번째 결혼을 할 때 바랐던 것은 이룬 삶을 살고 있습니다. 부모님에게서 벗어난 삶을 살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그녀는 외롭습니다. 부모님에게서 벗어나 산다는 것이 보금자리가 없어서 느끼게 되는 외로움을 잊게 해주는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래도 함께이면서 혼자라는 서글픔을 느끼며 사는 것보다는 좋다고 말합니다. ‘서글픔’이란 단어는 ‘외로워서 불쌍하고 슬픈’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같이 있는데 자신이 혼자란 외로움을 느끼고, 그렇게 같은 공간에서 혼자란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 자신이 불쌍하게 느껴지고, 그런 상황에 놓인 자신을 보자니 너무도 슬펐다고 합니다.
외롭고 싶지는 않지만, 더 외롭고 싶지 않기에 웅크려 사는 것을 선택한 그녀였던 거죠. 그녀가 겪었을 삶을 그려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죠.
만약에,
처음에,
애당초,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분명 다른 삶을 살 수 있고 다른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인 걸요. 아프고 힘든 시간 역시 자신의 이야기 일부로 안고 있는 분에게 더 외롭고 싶지 않아 웅크려 있지 않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섬세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분들은 높은 정서 반응성과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또 다치고 싶지 않아 갑각류와 같은 두꺼운 껍질로 자신을 감싸고 강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은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안은 너무도 여린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섬세한 성격의 사람에게 있어서 관계(연인이나 부부)라는 것은
노력보다
분별과 선택이 더 중요하더군요.
섬세한 성격의 사람에게 관계는 자연스러운 이끌림과, 그 안에 설렘과 편안함, 그리고 정서적 풍요로움이 필요하니까요. 그리고 혼자인 시간만큼이나 교감과 친밀감, 그리고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또한 필요하니까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과 그런 관계를 만들어가려고 하니 사랑이라는 것이 어려운 것이 되죠.
심리카페를 하면서 나와 맞는 사람을 만나기 위한 전제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많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접하면서 갖게 된 나와 맞는 사람을 만나기 위한 전제는 바로,
나
였습니다. 섬세한 성격의 사람은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섬세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두 다 똑같지 않고, 섬세한 성격 안에도 다양한 모습의 스펙트럼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어떤 환경,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는 섬세한 성격인지에 대한 아는 것은 나와 맞는 사람을 찾는 데에 필요한 첫걸음이죠.
어떤 사람이 자신이 바라고 필요로 하는 것을 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줄 수 없는 지를 알 수 있게 해 주죠. 그냥 막연히 착하고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이면 되는 것은 아니에요. 또한 상대에게 열심히 설명하고 부탁하고 요구한다고 줄 수 없는 사람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렇다고 이러저러한 자신에게 원인을 찾고만 있는 것은 권해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있어도 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필요하니까요.
“어이, 근본은 그냥 놔둬야지. 사람더러 변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거야.”
- 어빈 D. 얄롬의 <카우치에 누워서> 중에서
이러이러한 “나”와 맞는 사람이 어떠어떠한 사람인지를 아는 건, 섬세한 성격의 사람에게 중요한 일입니다.
당신도 당신의 성향과 성격으로 인해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 있는 것처럼 상대도 그래요. 상식적이고 상식적이지 않고나, 맞고 틀리고의 문제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니까요.
그렇게 맞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니?
그냥 다 적당히 포기하며 사는 거지.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죠.
그럴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살아가면 돼요. 어쩌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축복일지 모르죠. 하지만, 당신이 그런 사람이 아닌 것 같다면, 그런 당신에게 맞는 사람을 찾고, 삶을 만들어가려고 하면서 살아가면 되는 것이고요.
참고로, 카페에서 커플 그림검사를 해 드리다 보면, '참 부럽다'라는 느낌이 드는 커플들이 생각보다 많아요. 열 커플 중 네 커플 정도는 참 부럽다는 느낌이 드니까요. 나름 잘 맞는 사람과 만나 지내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자주 보는 저로써는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되겠니?"라는 말에 동의하기는 힘들겠네요. 마치 여론 형성을 위한 거짓 뉴스 같다고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