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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과 친구들 Nov 14. 2024

가을은 갈 때다

그러나 생각하며 갈 때다

Dear Paul,


이번 편지는 제가 하루 늦었어요.

저도 지난 주와 이번 주는 정신 없이 보냈네요.

물론 제 일이 아닌 클라이언트의 일 때문이었지만, 그게 또 곧 제 일이니까.

지금까지는.


어제 서울은 날씨가 정말 좋았어요.

완연한 가을색에 햇살마저 푸근해서 분주한 일상 속에 모처럼 마음 한 켠이 따스해지는 하루였습니다.

문득 길가에 핀 갈대를 보며 '갈색은 가을색이어서 가-ㄹ색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갈대는 가을에 피어서 가-ㄹ대?)


하지만 몇 년째 점점 짧아지는 가을을 생각하면 이 좋은 날들도 곧 지나가고 찬바람 스산한 계절이 돌아오겠다 싶어요.

좋으나 싫으나 시간은 흘러가고 나는 여기 더 머물고 싶지만 계절의 법칙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갈 때다


가을은 그렇게 제 등을 떠밀고 있습니다.

싸늘한 한기 속에 몸 덥힐 곳을 찾고, 목덜미 휘감는 바람으로부터 나를 지켜 줄 두터운 옷을 준비해야 하는 곳으로 저를 데려갑니다.

인생은 그렇게 가을에서 겨울로 한 걸음씩, 그러나 확실하게 나아가고 있습니다.


겨울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이 가을에 조금 더 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가을이 계속될 수 없다는 것도, 겨울이 확실히 다가오고 있다는 것도 알기에 진작부터 마음의 준비는 조금씩 해오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많은 부분은 폴에게도 신세를 지고 있지요.


가을의 햇살 속에서 다가올 겨울의 찬바람을 생각하는 법

혹독한 겨울의 한가운데를 절망하지 않고 버티며 지나는 법

그리고 다시 찾아올 봄을 바라며 겨울이 끝나는 곳 그 너머를 바라보는 법


이런 것들을 모두 폴이 먼저 앞서 걸어가며 보여준 덕분에 저는 선배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후배처럼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이제 폴은 어느새 긴 긴 겨울의 끝자락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요.

겨우 내 한 번도 지치지 않고—결코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겠으나—, 절망하지 않고, 멈추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서 여기까지 오셨어요.


멈추지 않고.

그것이 폴의 겨울을 가장 빛나게 하는 것 같아요.

다시 올 봄을 더 값지게 만드는 것도 그것이고요.

그 꾸준한 열정이 폴의 발걸음을 겨울의 눈 속에 얼어붙지 못하도록 만드는 힘이라고,

저는 지금 저 앞에 다가오는 겨울을 보며 생각하고 있어요.

긴 긴 터널을 다 통과하기까지 발길을 멈추지 않게 할 꾸준한 한 걸음, 한 걸음을요.


겨울을 난 나무는 새로운 봄에 나이테가 하나 더 생긴대요.

혹독한 계절을 견디고 버티며 마치 죽은 듯이 생장을 멈추었던 그 시간이 훈장처럼 새겨지는 거에요.

그 훈장을 안에 품고 밖으로 다시 생장하며 새 순을 틔우고 잎을 내고 여름을 맞이합니다.


폴에게도 지금 이 시간이 나이테처럼 새겨지고 있겠죠.

조금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그걸 안에 품고 생장하고 있는 모습도 발견하게 될 테고요.


저는 이제 곧 생장을 멈추고 겨울을 맞을 준비를 합니다.

가을 볕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지만 머잖아 그마저 스러져버리고 나면 새로운 나이테를 새길 계절이 찾아 올 거에요.

그 때가 되면 폴의 발걸음을 생각할게요.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갈게요.


지금은 가을,

생각하며 갈 때에요.



Sincerely,

Dani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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