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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자 Jul 12. 2017

그 여行자의 집 (4)

2015년 겨울, 서른여섯 단아의 그 해. #4

4.

「단아야, 있잖아. 우리 부모님 만나는 거…. 조금만 더 미루면 안 될까? 요즘 매형 때문에 우리 집 분위기가 너무 안 좋아서 그래. 한두 달 정도만 있다가 좀 가라앉으면….」

순간 짜증이 치밀었다. 이런 비슷한 핑계가 대체 몇 번째인지. 내가 부모님을 만나야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결혼하자고 보챈 것도 아닌데 왜 번번이 독촉하는 빚쟁이 같은 기분을 느껴야 한단 말인가. 나는 그의 이야기를 끊고 이제 그만하자고 말해버렸다. 처음 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안도하는 듯한 애매한 그의 표정을 보며 이게 정말 우리의 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서자 재현은 당황한 듯, 혹은 당황을 보여주기 위한 듯 엉거주춤 따라 일어섰다.

「단아야, 왜 그래? 화났어? 내 말은 그게 아니고. 너 오늘 좀 이상한 거 같다. 나중에...」

라고, 갈등을 싫어하는 평소의 그답게 말했지만 우리는 더 이상 평소 같지 않았다. 야, 이 자식아! 이상? 이상은 나만 해? 너도 이상해. 이 거지 같은 세상도 이상하고. 사람들도 다 이상하다고. 나는 왜 이런 놈을 만나서 제대로 대우도 못 받고, 매번 뒤치다꺼리만 하고.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막말을 뱉어버리고 싶은 욕구를 누르며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째려보곤 카페를 나왔다. 그는 따라오지 않았다. 끝이다. 다시는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가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괜스레 눈물이 흘렀다. 분명 슬픈 건 아니었는데.


어느덧 6주가 흘렀다. 그날 이후, 그는 연락하지도 찾아오지도 않았다. 딱 한 번. 그 날로 부터 닷새 후 밤 12시. 그로부터 전화가 왔고, 벨이 다섯 번쯤 울렸다. 나는 받지 않았고, 그는 더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그가 술을 마시고 전화를 한다고 생각했고, 그는 내가 깨어 있지만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7년이란 세월은 그런 것이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런 상황에서 늘 별일 아닌 듯 행동하고, 받아줬던 나였다. 어쩌면 이상하게 군 건 그가 아니라 나였는지도 모르겠고, 그 끝 역시 그에 의해서가 아닌 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경화는 자고 갈 모양인지 씻고 있다. 격주 금요일 밤마다 우리 집에 오는 경화는 항상 자고 가도 되는지를 묻곤 했는데, 한 달 전부터는 묻지 않는다. 나는 말로 듣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위로를 안다. 18년의 세월이란 그런 것일까. 아니 모르겠다. 다음날 점심을 먹고 나서야 경화는 약속이 있다며 돌아갔다. 어느덧 일요일 저녁이 되어 있었는데 나는 그녀가 떠난 후 뭘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난 주말에도 무얼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무섭단 생각이 들었다. 왜 기억이 나질 않는 것일까? 혹시 알코올성 치매라도 걸린 건 아닐까? 늘 나보다 한두 잔씩 더 마시는 경화도 멀쩡한데? 머릿속을 헤집어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주말뿐 아니라 목요일 저녁에 뭘 먹었는지, 수요일 점심에 뭘 먹었는지도 기억할 수가 없었다. 분명 지난주 어느 점심에 직장동료와 둘이 오랜만에 좋아하는 무안 낙지집에 가 낙지볶음과 맥주 한 병을 나눠 먹으며 수다를 떨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게 월요일이었는지 화요일이었는지도 쉬이 알 수가 없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진아였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여보세요.」

「언니! 잘 지내?」

잘 지내냐고? 우리가 과연 서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처지일까? 잘 지낸들 잘 지낸다고 말할 수도, 못 지낸다고 괜한 푸념을 늘어놓을 수도 없거늘. 나는 그녀의 질문에 감정이 실려 있음을 느꼈지만 무미건조하게 흘려보내려고 노력한다.

「혹시, 엄마는 소식 없지?」

「응.」

「그렇구나. 내가 간밤에 엄마 꿈을 꿨거든. 꿈에서 언니인 줄 알고 불렀는데 뒤돌아보니 엄마더라고. 그래서 혹시나 해서….」

나는 딱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거의 한 달 만에 전화를 한 진아는 내게 안부를 묻자마자 엄마의 소식을 물었다. 우리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엄마는 대체 어디로 갔을까? 혹시라도 어디선가 홀로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는 건 아닐까?



프로젝트 여행자의 집, 네 번째 이야기 中 : 자세한 이야기는 들어가는 글 참고

그 여行자의 집 : 첫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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