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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신비를 논하는 연구자들의 계급장 뗀 개싸움 한판

수전 블랙모어의 『뇌의식의 대화』를 읽고

수전 블랙모어는 진화심리학과 밈, 의식의 신비를 연구하는 심리학자이며 2000년 의식을 주제로 한 국제학회와 이후의 여러 학회들에서 의식을 연구하는 여러 철학자, 심리학자, 과학자들을 찾아 인터뷰를 했다. 그 인터뷰 기록을 모은 책이 이 『뇌과학의 대화』이다. 이 책은 2000년대 당시 의식 연구에 관한 그당시 최신 트렌드와, 첨예하게 논쟁하고 있던 각 학자들의 견해차를 살펴볼 수 있는 아주 좋은 책이다.

뇌의식의 대화 - 수전 블랙모어 (2020)


보통 한 명의 학자나 두 명 이상의 견해가 일치한 학자들의 책을 읽으면 그 학자들의 주장밖에 읽어볼 수가 없고, 왜 이 학자가 다른 학자들의 견해를 이렇게 강경하게 반박하는지 그 느낌을 제대로 전달받기 힘들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정말로 재미있는데, 의식을 연구하던 당시의 거의 모든 학자들의 견해를 아주 동등한 분량과 관점으로 써 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의식의 이론에 대한 각 학자들의 견해차를 이 책을 읽음으로써 비로소 제대로 넓은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더 재미있는 건, 학자들이 자신의 견해에 반대되는 주장을 하는 상대 학자들을 진짜로 신랄하게 비판하고 비난하고 욕하는 대사를 책에 그대로 실어놓았다는 점이다. ‘집단 사기극’이니, ‘아무런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느니, 심지어 "나무야 미안해" 드립까지 나올 정도다. 그 점잖아 보이는 노교수들이 원래 이렇게 강하게 말하는 사람들이었다는 데에 충격적이다. 혹자는 뭐, 교수들은 확실히 검증되지 않으면 강한 견해를 말하는 걸 꺼린다고 하던데, 이 책을 읽어보니 전혀 아닌 것 같다.


이 책의 단점으로는 인터뷰들이 이루어진지 벌써 20년이나 지났다는 점인데, 사실 솔직히 말해 내가 봤을 때는 의식 문제는 그때나 지금이나 밝혀진 건 별로 없는 것 같기 때문에 그다지 단점은 아니다. 다른 하나의 단점으로는 유명한 몇몇 의식 연구자들이 빠져 있다는 것인데(제럴드 에델만, 줄리오 토노니, 제리 포더, 스티븐 핑커, 김재권 등) 이건 확실히 좀 아쉬운 일이지만 이미 리스트엔 유명한 대가들이 정말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 역시 별 일 아니다. 이 책은 2024년에도 여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으며, 심지어 여러 견해들을 내가 이해한 대로 정리해 10년이나 20년 후까지도 계속 읽어 보며 되새길 필요가 있다. 나는 이제부터 나만의 관점으로 각 학자들의 견해를 비슷한 그룹으로 묶고, 그들이 상대 학자들을 어떻게 비판하고 비난하는지, 어떤 관점에 대해 동의하거나 반대하는지를 정리하려고 한다. 이 글은 엄청나게 길어질 예정이고, 전부 다 읽기보단 관심가는 학자의 내용만 골라 읽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래는 그 내용이다.




의식의 문제는 가짜 문제이며 궁금한 점은 아무 것도 없다는 관점 (내 생각과 가장 비슷함)

대니얼 데닛

철학자. 내가 몇 권의 데닛의 책을 리뷰한 적이 있다. 의식에 관련한 저서로는 『의식의 수수께끼를 풀다』라는 책이 있고, 여기에서 그는 ‘다중 초안 이론’을 고안하여 ‘데카르트의 극장’ 개념을 논박하였다. ‘데카르트의 극장’이란, 우리의 뇌 속 어딘가에 모든 정보가 수렴해 의식이 발생한다는, 즉 우리의 머리 속에 ‘또 하나의 나로서의 의식’이 있다는 관념이다. 수전 블랙모어도 대니얼 데닛의 전반적인 관점을 옹호하는 편이며, 다른 인터뷰에서 자기도 모르게 이 데카르트의 극장 개념을 이용해 의식을 설명하려 하는 철학자들을 잡아내기 위해 함정 질문들을 퍼부었다. 그리하여 아마 (세보지는 않았지만) 책의 모든 인터뷰를 통틀어 대니얼 데닛의 이름이 가장 많이 등장한 것 같다. 대부분 부정적인 견해로서.


데닛은 많은 사람들이 ‘데카르트의 극장’이라는 개념을 거부하면서도 스스로 데카르트의 극장을 이용해 의식을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 유물론을 주장하면서도 진짜 엄밀한 유물론적 이론을 수립하기 정말로 어렵다는 사실, ‘현상학’이라는 용어가 이론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현상들을 뭉뚱그려 통칭하기 위해 사용했다고 말하는 등 엄밀한 정의와 올바른 질문만이 난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비판점은 ‘자기-현상학’인데, 그는 곧 내성주의자, 다르게 말하면 1인칭 주관을 바탕으로 증거를 들이미는 사람들이 의식에 대한 잘못된 결론을 낼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타자현상학을 이용해, 즉 완전히 객관적인 과학적 방법론을 이용하여 의식을 연구하기만 한다면 모든 현상이 잘 설명되고, 감각질이나 어려운 문제 또한 사라질 것이며, 의식 문제 역시 해결될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저술 스타일이 “꽤나 술술 읽힌다”는 망발을 서슴지 않는다.


자유의지에 대한 견해로는, 그 우주가 결정론이든 비결정론이든 실제로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의지는 없다는 것은 변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치 판단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능력이 있다면 자유의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의외로 수많은 인터뷰어들이 (데닛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자유의지에 대해 데닛과 비슷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패트리샤 & 폴 처칠랜드

부부 철학자로, 인터뷰조차 같이 진행했다. 감각질이란, 여러 색깔이나 소리, 냄새, 감촉이 제각기 다른 느낌을 일으킬 때, (그러한 느낌들 자체가 아닌) 느낌들 간의 차이를 의미한다. 주관적 경험은 뇌세포 활성화 패턴에 지나지 않는데, 예를 들어 색이라는 감각질의 경험은 세 종류의 원추세포 및 대립 과정 세포가 작용한 결과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세 집단의 ‘벡터’값에 불과하다.(이런 관점이 나의 생각과 가장 비슷하다.) 벡터 공간이 실제 자극들에 어떻게 대응되는지가 밝혀지면 그것으로 감각질의 미스터리는 풀릴 것이다. 마치 빛이라는 현상이 전자기파의 원인이나 결과가 아니라, 단지 동일한 것을 칭하는 것과 같다.


찰머스의 ‘의식의 어려운 문제’에 대해, 플로지스톤 개념처럼 곧 소거될 ‘집단 사기극’이며, ‘철학적 좀비’는 사상 최악의 사고 실험이라고 말한다.

스튜어트 하메로프와 로저 펜로즈의 ‘양자 의식 이론’에 대해, 그야말로 얼토당토않은 헛소리라고 말한다.

찰머스, 콜린 맥긴, 제리 포더 등의 철학자들이 ‘과학이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논의하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다고 비난하며, 이것을 패트리샤와 폴 처칠랜드는 “신경과학에 밥그릇을 뺏기지 않으려는 전형적인 철학자들의 패배주의”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한다.

데닛은 감각질에서 ‘보고가능성’만이 의식의 필요충분조건이라고 말하지만, 그들은 데닛이 “너무 행동주의자처럼 굴며”, 그들은 데닛보다는 더 생물학적이라며 데닛의 견해에 일부 반대한다. 그들은 인간의 내부에서 생성되는 질적 경험이 존재하며, 그와 동일한 두뇌 상태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케빈 오리건

변화맹이나 시선 도약 연구로 유명한 심리학자라고 한다. 그는 의식의 어려운 문제가 전혀 어려운 문제가 아니고, 언어의 오용에서 비롯된 가짜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의 이론은 지각이란 정보를 얻는 과정이 아니라, 우리가 그 지각의 감각질이 무엇인지 묻기 때문에 일어나는 '행동'이라는 독특한 설명이다. 즉 궁금해하지 않는 건 의식할 수 없다.


주관성, 자유의지, 감각질 같은 개념들은 전부 밈의 일종이라는 블랙모어의 관점에 동의한다.

대니얼 데닛의 견해도 동의하는 편이다. 그는 데닛과 자신을 묶어 '신-행동주의자'로 규정한다.


프란시스코 바렐라

생물학자이자 신경학자. 현상학을 융합한 ‘신경현상학’을 연구한다고 한다. 의식이 다른 주제들에 비해 특별히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힌다. 의식의 사적인 성질(감각질, 혹은 현상적 의식)과 접근가능성(접근적 의식)을 구분하는 관점에 대해 반대한다. 경험이 오직 그 사람에 의해서만 보고될 수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 보고한 바를 상호주관적으로 검증하는 게 가능하다고 본다. 이른바 신경과학과 현상학의 두 관점을 동시에 적용한다는 건데, 다시 말하면 신경과학적 지식에 ‘일인칭 데이터’를 결합한다는 것이라고 한다. (대니얼 데닛이 듣는다면 기겁할 만한 얘기겠지만, 나로서는 둘 사이는 ‘문제는 없다’는 관점에 함께 동의하고 있고 차이는 단지 비슷한 방법론에 다르게 붙여진 이름일 뿐이라고 여겨진다.)


철학자를 극혐하며 아직은 정말 아무 것도 모르겠지만 과학을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밝혀질 것이라는 관점(약간의 동의)

프랜시스 크릭 & 크리스토프 코흐

프랜시스 크릭은 DNA를 발견한 생물학자이며 크리스토프 코흐와 함께 ‘의식의 신경상관물’을 중점적으로 연구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의식이란 '의식의 신경상관물'에 불과할 뿐이다. ‘의식의 어려운 문제’에 관해서는 별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단지 언젠가는 풀릴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연구하는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의식의 신경상관물이란 특정 역치를 넘으면 활성화되는 세포 집단의 동시적 발화이다. 실증적으로 양안경쟁에서 일어나는 대뇌피질의 신호 전달 속도를 재고, 그 신호의 시간 지연을 추적해 신호가 어떤 경로로 퍼져 나가고 또 피험자의 의식이 언제 바뀌는지를 측정해 검증할 수 있다고 본다. 코흐는 네커 큐브에서 지각의 전환이 일어나는 과정의 연구를 예시로 들었다. 둘 다 하나의 정지된 도형이 시간에 따라 지각적으로 다르게 의식되는 bistable figure의 예시이다.


 ˙크릭은 제럴드 에델만과 줄리오 토노니의 이론을 긍정하며, 그들의 견해 대로 특정한 의식적 경험은 무한히 많은 가짓수 중 단 하나에 불과하고 나머지 엄청나게 많은 신경 활동들은 무의식 상태로 남아 있다고 본다. (대략 1~10%로 대략 추산한다.)

크릭은 버나드 바스의 통합 작업공간 이론은 너무 모호하고 자신과 코흐의 이론은 그보다 훨씬 엄밀하고 효과적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이론은 상호작용의 구조와 동역학까지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크릭과 코흐는 둘 다 철학자들을 극혐한다. 크릭은 철학자들은 질문은 잘 하는데 답을 얻는 법을 모른다며 깐다. 특히 철학자의 사고 실험은 아인슈타인 말고는 전부 증명할 수 없이 툭 뱉는 주장이라고 말한다. 특히 대니얼 데닛의 ‘다중 초안 이론’은 뇌세포를 다루지 않는, 순전히 심리학적인 이론이라며 아무 쓸모 없다고 깐다. 코흐는 "철학자들이 벌이는 지난한 말잔치에 아무런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고 언급했다.

데이비드 찰머스의 철학적 좀비는 존재할 수 없다고 본다. 크릭은 의식이 없다면 몽유병 환자와 비슷해 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크릭은 대니얼 웨그너가 ‘자유의지란 유용한 부수현상이다’라는 주장은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니얼 데닛의 『자유는 진화한다』는 웨그너에 비해 너무 길고 핵심을 못 짚어 낸 책이라며 깐다.

코흐는 대니얼 데닛이 말하는 '감각질이란 허상이다'라는 주장에 대해, 자신의 주관적 경험(치통)의 예를 들며 그게 실존하지 않을 리 없다고 주장한다. (사실 이렇게 개인의 주관적 경험을 토대로 존재를 증명하는 일이야말로 데닛이 공격하는 포인트이다.)

코흐는 네드 블록이 주장한 '현상적 의식과 접근적 의식의 구분'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실험적으로 그 의식을 구분할 방안이 없기 때문이다.


수전 그린필드

알츠하이머의 신경 퇴행 매커니즘이나 마취에 따른 의식의 심도를 주로 연구한 과학자. 신경망이 의식을 생성하는 매커니즘에 대해서는 “지금은 예측조차 불가능하다”며 조심스러워 하는 입장이다. (인터뷰이 가운데 가장 조심스럽게 얘기한 나머지 그녀의 주장에 대해 확실히 얘기한 것이 거의 없다.) 동물의 의식에 대해서는, 아무리 단순한 동물의 뇌라도 의식이 있을 수 있으며, 태아 또한 의식을 가질 것이라고 본다.


코흐와 크릭은 “뇌가 의식을 생성하는 메커니즘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조차 그 의미를 심각하게 곡해하고 있다고 밝혔다.

레이 커즈와일이나 대니얼 데닛이 “의식을 인공적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라고 말한 것에 대해 화가 치민다고 분노한다. 그 이유는, 실증적인 증거가 아닌 믿음에 기초하여 무언가를 주장하는 게 아주 비과학적인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런 분노와는 별개로, 수전 그린필드는 인공 의식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으며, 만약에 그걸 만든다 해도 검증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존 설을 좋아하지 않지만, 자유의지에 관해서는 그와 마찬가지로 ‘있다’고 본다.


과학이 밝혀낼 수 없는 뭔가가 있으며 그것이 바로 의식이라는 관점 (근데 그게 뭔데?)

네드 블록

‘접근적 의식’과 ‘현상적 의식’을 구분해 설명한 철학자. ‘현상적 의식’이 바로 의식의 ‘감각질’이며, 데이비드 찰머스의 ‘의식의 어려운 문제’이다. ‘중국 뇌 논증’으로도 유명한데, 말하자면 중국의 전 인구가 휴대전화로 서로 소통하고 있다면 결과적으로 중국 전체가 하나의 뇌로 작동할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네드 블록은 여기서, 중국 뇌나 인간의 기능을 정확히 모사한 로봇에게는 현상적 의식이 없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즉, 철학적 좀비가 있다고 믿는다.


대니얼 데닛과 같은 기능주의자나 행동주의자들은 중국 뇌는 자연스레 현상적 경험을 할 것이라 주장한다고 언급하며, 그들이 완전히 틀렸다고 말한다. 또한 케빈 오리건이 현상적 경험의 개념화를 포기하고 의식을 기능적으로 서술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 반대한다.

또 하나의 철학적 좀비, 데이비드 찰머스의 ‘찰머스 좀비’에 대해, 인간과 완전히 똑같지만 현상적 의식이 거세된 인간이라고 설명한다. 블록은 이는 불가능해 보인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의식이란 뇌의 생리학적 특성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책에 언급되지 않았지만 존 설의 주장과 흡사하다.)

자유의지에 대해, 데닛의 주장인 ‘자유의지는 결정론과 비결정론 모두에 모순된다’는 견해,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좁은 의미의 자유의지, 우리가 선택지를 능동적으로 고를 수 있음에 대한 자유의지에는 찬성한다.

데닛의 또 다른 주장인 ‘데카르트의 극장의 허구성’에 대해, 당연히 맞는 말이며 심지어 그 데카르트의 극장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데닛은 허수아비 때리기를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존 설

철학자로, ‘중국어 방 논증’ 사고실험으로 의식 논의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중국어 방 논증’은 컴퓨터로는 인간 수준의 강인공지능이나 의식을 구현할 수 없다는 관점이다. 부수현상설에 대해서도, 자유의지가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기존 과학자들과는 다르게 반대한다. 하지만 의식의 기능이 진화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관점은 어느 정도는 다른 학자들과 의견이 같은 것 같다.


대다수 신경생물학자들이 집중하는 ‘신경상관물’에 대해, 그게 발견되면 의식의 나머지 수수께끼가 풀릴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믿음을 “벽돌 찾기 접근법”이라고 비판한다.

로저 펜로즈의 ‘양자 의식 이론’에 대해, “두 개의 신비를 한 개의 신비로 어물쩍 엮으려는 시도”라며 깐다. 하지만 접근 방식을 다각화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말하며 그렇게 크게 비난하지는 않는다.


의식은 우주의 기본 원리라는 범심론적 헛소리를 하는 관점

데이비드 찰머스

의식을 최초로 ‘쉬운 문제’와 ‘어려운 문제’로 나누어 생각하자고 주장해 유명해진 철학자. 또한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제자이며, ‘철학적 좀비 논증’으로도 유명하다. 찰머스는 어려운 문제인 ‘의식의 주관성’이 우주의 물리적 현상이 모두 규명된다 하여도 풀리지 않을 것이라 말하며, 의식을 시간, 질량, 전하와 같은 우주의 기본 요소로 취급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른바 범심론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 “우주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의식은 분화되지 않은, 매우 단순한 형태일 것이며, 그 기본적인 ‘의식 장(field of consciousness)’들이 잘 합쳐진 결과가 우리의 자아이다.”


인간과 기능적으로 완전 똑같으면서도 주관적 경험이 없는 ‘철학적 좀비’가 존재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우리의 우주에서는 불가능하겠지만, 그러한 논리적 ‘가능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왜냐하면 우리의 우주에서는 ‘의식’이 우주의 기본 요소이기 때문에...의식 연구에 있어서 꽤나 중요한 함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수전 블랙모어는 전 인터뷰이들에게 이 ‘철학적 좀비가 가능하냐’는 질문을 물어보았다.


하지만 스튜어트 하메로프와 로저 펜로즈의 ‘양자 의식 이론’에 대해, 너무 사변적이며 그런 식으로 문제를 우회해서는 해답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한다. 우주의 기본 원리 운운하면서 또 가장 가까워 보이는 펜로즈의 이론은 까다니, 알 수 없다.


맥스 벨만스

빅뱅 이후 우주가 확장을 거듭하며 생명과 의식의 존재를 만들고, 그 의식을 가진 우리를 통해 스스로의 모습을 되돌아본다는, 검증도 반증도 불가능한 이상한 이론을 만들었다. 또한 의식이 태초부터 존재했으며 의식의 형태는 물질의 형태와 공진화함으로써 결정된다는 범심론에 대한 얘기를 한다.


하지만 찰머스의 이론에는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데, 그의 주장에 따라 기능만이 의식을 결정한다면 로봇도 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찰머스의 관점과는 아주 구체적인 부분에서 다른데, 맥스 벨만스는 두뇌 상태와 감각질의 경험은 단지 하나의 사건에 대한 두 가지 양상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뭐가 다른지 모르겠는데 조금 다른 것 같긴 하다.)


리처드 그레고리

실명 환자들의 시력 회복이나, 인지 로봇을 만드는 등의 활동을 한 신경심리학자. 의식이란 단지 기능이며, 개체의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한 진화적 설계라는 관점을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당연히 찰머스의 좀비는 반박된다고 생각할 것이고 실제로도 그렇게 대답한다. 또한, 현재를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분리하는 기능이 바로 의식이라는 독특한 주장을 말한다. 수전 블랙모어는 리처드 그레고리의 설명이 감각질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음을 지적하는데, 그레고리는 그게 무슨 문제냐고 대꾸한다. 그는 감각질이란 단지 뇌에서 생성된 감각일 뿐이라며.


과학을 열심히 하다 보면 의식의 신비도 밝혀질 것이라는 점에서 프랜시스 크릭에 동의하지만, 굳이 뇌과학 분야에서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제발 양자역학으로 가진 마...)

감각질이 없다는 대니얼 데닛의 주장이 도가 지나친 것 같다고 하며, 감각질이 있다는 건 부정하지 않는다.

책에는 자세한 설명을 하진 않지만, 이원론을 지지하는 것 같다. "한 가지 실체밖에 없는 우주는 너무 따분하다." 이원론자라니 감각질이란 “단지 감각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게 무슨 말인지 그제서야 이해가 된다. 감각질을 환원 불가능한 하나의 우주의 원리로 보는 것이다.


스튜어트 하메로프 & 로저 펜로즈

로저 펜로즈는 괴델과 튜링의 '계산가능성'과 의식의 관계에 대해 천착하며, 그가 정립한 이론은 계산불가능한 의식의 속성(그것을 감각질이나 주관성이라 해도 좋겠지만, 그는 그것이 의식의 '비알고리즘적 속성'이라고 본다)이 양자역학의 아직 밝혀지지 않은 속성으로부터 밝혀질 것이라 보고 있다. 하메로프도 비슷하게, 의식이란 우주의 기본 요소로 본다. 즉 질량, 전하처럼 환원 불가능한 요소로 본다. 하메로프는 찰머스가 어려운 문제와 쉬운 문제의 개념을 처음 발표했을 때 그 관점에 대해 지지를 보냈으며, 그의 철학적 좀비 논증에 대해서도 찬성한다. 하지만 찰머스가 의식이 '정보처리'이며 물리적 크기와는 관계없다는 관점에 대해 동의하지 랂으며, 플랑크 공간에 들어갈 정도로 의식의 감각질이 작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뇌가 시공간의 기본 입자로부터 감각질을 읽어 낸다고 한다.


펜로즈의 비알고리즘적 양자의식 이론과 뇌속의 미세소관 구조에 대한 하메로프 이론과 결합하여, 미세소관이야말로 우주의 미세 구조인 감각질을 계산하는 양자컴퓨터라는 기발한 이론을 주장한다. 자유의지도 그런 식으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죽음 이후의 의식이 있는가라는 블랙모어의 질문에 대해 거의 유일하게 진지하게 '그렇다'고 답한 사람바로 하메로프다. 죽음 이후 미세소관의 양자 결맞음이 사라지면 의식의 양자 상태가 양자 얽힘으로 인하여 잠재 의식이나 꿈처럼 영원히 소멸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검증이나 반증 가능한게 맞는거냐!) 하지만 로저 펜로즈는 의외로 죽음 이후의 의식에 대한 관점에는 '증거 없음'을 들어 반대한다.


대니얼 데닛의 "의식의 수수께끼를 풀다"에 대해, 하메로프는 "그는 정말 좀비가 맞다"는 치사한 비난을 퍼부었다.

하메로프는 제럴드 에델만의 주장, "복잡성으로부터 의식이 창발한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하메로프는 패트리샤 처칠랜드의 강한 비판에도 '그 여자는 제대로 된 이론도 없고, 우리 이론을 이해하지도 못했다'고 맞대응한다. 또한 다른 기능주의자에 대해서도, 그들의 이론은 검증도 반증도 불가능하지만 양자 의식 이론이야말로 반증가능성이 있는 진짜 과학이론이라고 말한다.(아닌것 같은데)


그밖에 각자의 이론들, 관점들

버나드 바스

“무대 위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어진 가장 밝은 지점이 의식이다”라고 비유할 수 있는 ‘통합 작업공간 이론(Global workspace theory)’의 주창자. 예전에 한 번 언급한 적 있는 스타니슬라스 드앤의 ‘통합 신경 작업공간 이론(Global Neuronal Workspace Theory)’와 한 단어만 빼고 이름이 같으니, 같은 계열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 싶다.


본문에 언급한 대로 다시 말하면, 의식이란 “뇌에 유입된 정보가 통합 작업공간이라는 이름의 특수한 분산 처리, 혹은 신경망을 거쳐 다른 수많은 무의식적 과정들에 제공하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 시각피질에서 정보처리하는 과정을 살펴보자면 시각피질의 가장 하위 단계에서는 점만 인식하고, 다음 단계에서는 선을, 그다음에서는 가장자리를, 더 올라가면 움직임이나 색상을 인식한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이 과정이 무의식의 단계이며 여기서 Lower temporal cortex의 사물 인식 뉴런에서야 비로소 의식의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진다고 한다.


제럴드 에델만의 ‘신경 다윈주의’, 즉 신경세포 집단 간의 협력과 경쟁에 대한 의식 이론을 어느 정도 옹호하고 있다.

‘무대 위 스포트라이트’라니, 대니얼 데닛이 비판해 마지 않던 ‘데카르트의 극장’과 유사하게 들려 블랙모어가 바스에게 질문해 본 바, 데닛은 바스의 이론을 한 번 비판했으나 나중에 철회했다고 한다.

힌두교에 나오는 ‘순수 의식’, 즉 ‘내용물이 없는 의식’을 실험으로 검증해 보고 싶다는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다.


스티븐 라버지

자각몽 연구자. 인터뷰 동안 자각몽에 관련된 내용을 주로 다뤄서, 의식에 관한 관점은 크게 없었다.

 

토마스 메칭거

철학자. 오직 자신만이 ‘주관성’의 의미를 올바로 알고 있다고 말한다. 만약 제대로 정립된 객관적 의식 이론이 있더라도 우리는 그 이론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텐데, 왜냐하면 박쥐의 감각질에 대한 객관적 이론이 있더라도 우리는 박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의식적 마음이 실재와 자아를 그려 내는 방식대로 현실을 파악하는 것을 ‘현상적 표상’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유전자의 생존과 복제에 도움이 되는 유용한 ‘환상’이라고 정의한다. (그 이후로는 그다지 흥미롭지 않은 철학적 내용 뿐이다.)


빌라야누르 라마찬드란

『라마찬드란 박사의 두뇌 실험실』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신경과 의사. 감각질과 자아의 이분법적 구별은 잘못되었으며, 그들의 관계는 동전의 양면과 같기 때문에 자아가 없다면 감각질도 없으며 감각질이 없으면 자아도 없다고 한다. 또한 오직 인간만이 의식을 가지며 동물은 의식을 가지지 않는데, 그것은 인간만이 지닌 메타자각(Meta-awareness) 때문이다. 고양이도, 만약에 고양이가 가시에 박혀 고통에 찬 울음소리를 내었다 해도, 그것은 단지 고통이 아닌 회피반사일 뿐이다. 감각질 또한 기계적인 설명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 메타표상 개념을 도입해야 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수전 블랙모어는 라마찬드란이 리처드 그레고리와 닮았고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런가? 난 잘 모르겠다.)

대니얼 웨그너의 주장, 자유의지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부수현상론적 관점에 대해, “대니얼 데닛의 사후 합리화와 별반 다르지 않다”며 깐다. (난 무슨 맥락에서 말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대니얼 데넷은 자유의지가 실존한다고 했는데)


페트라 슈퇴리히

맹시를 연구하는 심리학자. 맹시의 연구 성과와 그 함의를 밝히는 인터뷰 내용은 매우 흥미롭다. 의식은 기본적으로 진화적으로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에 생겼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여러 연구자들이 이 관점을 지지함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독특한 관점은 아니다)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찰머스의 철학적 좀비의 개념을 매우 싫어한다고 밝힌다. “나무가 아까울 정도다”


대니얼 웨그너

‘힌곰을 생각하지 마’라고 하면 흰곰이 더 생각난다는 강박사고를 연구한 사회심리학자. 당연하지만 흰곰을 생각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피험자는 자신의 주관적 내성을 바탕으로 보고를 하기 때문에, 그의 연구는 대니얼 데넷이 극혐하는 자기현상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대니얼 데닛의 주관성을 부정한 것에 동의하지 않으며, 우리 자신이 데카르트의 극장에서 관객이 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는 건 사실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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