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엔의 사랑_데드 포인트를 통과하는 법

by 램램

1월부터 매주 일요일마다 5킬로미터씩 달리고 있다. 달리기를 처음 시작한 건 2년 전, ‘런데이’라는 애플리케이션과 함께였다. 덕분에 몇 년 간 걷기만 하던 산책로를 처음으로 달리기 시작했고 조금씩 달리는 시간을 늘려가다 30분을 쉬지 않고 달리는 데 성공했다.


런데이 30분 코스의 기록


처음에는 숨도 차고 배도 아프고, 달리는 내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자꾸 신경 쓰였다. 하지만 우선 달리기 시작하면 그대로 달릴 수 있게 되었다. 1년 전까지는 1킬로만 달려도 쉬어야 했는데 이제는 5킬로는 너끈히 달릴 수 있고, 얼마 전엔 10킬로도 쉬지 않고 달렸다. 그전까지 운동회나, 체력장 말고는 달려본 적 없던 내가 이렇게 달리기를 즐기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 못 했다.


몸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달리기를 통해 깨달았다. 처음 우울증을 겪었을 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 계속 잠들고 싶었고, 하루, 일주일이 빨리 지나가기만 바랬다. 캄캄한 하루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산책을 하던 어느 날 갑자기 한 번 뛰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백 미터쯤 우다다 달리다가 숨도 차고 남들 시선도 신경 쓰여 멈췄다. 하지만 왠지 기분 좋은 심장박동이 남아있었다. 그렇게 달리기를 시작하게 된 것 같다. 계속 발을 딛고 앞으로 나가다 보면 내 호흡과 내 몸에만 집중하게 된다. 숨이 차고 힘들어서 다른 생각이 끼어들 시간이 없다 보니 나를 괴롭히는 상황이나 사람이 별 것 아니게 느껴진다. 목표한 거리를 완주하면 성취감과 기분 좋은 피로감 덕분에 걱정 없이 잠들 수 있다. 가만히 누워만 있을 때는 묵직하게 나를 짓누르던 생각과 걱정이 달리기 시작하면 점점 흐릿해졌다. 달리며 마음의 무게를 조금씩 덜어내게 되었다.




영화 <백 엔의 사랑>은 나를 침대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해 준 영화였다. 주인공 이치코는 서른두 살이 되도록 제대로 일해본 적도 없고, 부모님 집에 얹혀살며 매일 게임하고, 술 마시며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여동생과 크게 싸운 뒤 혼자 방을 얻어 독립하고(물론 엄마 돈으로) 백엔샵에서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도 시작한다. 실력 없는 복서와 연애를 하지만, 남자는 이치코가 마음을 열자마자 떠나버리고, 이치코는 대신 복싱을 시작한다. 구부정한 자세와 무거운 몸으로 엉성한 잽을 날리던 이치코는 몇 달 뒤 어깨를 펴고 눈을 빛내는 복서가 되어 있다. 엉망진창인 모습에 멍한 눈을 가지고 있던 첫 장면의 이치코와 복서가 된 이치코는 전혀 다른 사람 같다. 복싱은 그녀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조카 앞에서 줄담배를 피우는 엉망진창 이치코



링 위에서 피 터지게 싸우다가도 경기가 끝나면 상대 선수와 끌어안고 서로 도닥여주는 마지막 순간을 보며 복싱에 매료되었던 그녀는 복싱경기에 꼭 출전하고 싶어 한다. 처음으로 출전한 경기에서 딱 두 번의 펀치만 날리고 완패하지만, 비틀거리며 상대 선수에게 다가가 끌어안고 서로 등을 두드린다. 계속 고맙다고 말하는 이치코의 표정은 마치 자기 자신을 도닥여주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여기까지 온, 비록 졌지만 경기를 해낸 자신에게 주는 칭찬처럼.



백엔샵 로고송과 함께 데뷔전

이치코가 링 위에 등장할 때 백엔샵 매장에서 매일 같이 흘러나오던 로고송이 나온다. 왜 이런 노래를 골랐냐 묻는 코치에게 이치코는 답한다. “전 백 엔짜리 여자거든요” 처음엔 자신이 백엔샵의 물건처럼 별것 아닌 사람이라고 자조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영화가 끝나고 보니 다른 의미로 들렸다. 이치코는 한자로 一子, 숫자 하나에서 시작한 사람이다. 그리고 결국 100이라는 숫자에 닿는다. 누군가에겐 별 것 아닌 성취일 수도 있지만, 하나에서 백까지 그녀는 처음으로 일생의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남들보다 늦고, 어리석은 선택도 하지만 스스로를 움직여 자신이 원하는 목표에 도달한 이치코의 모습이 내 세포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뭐가 됐든, 어떻게든 움직이고 발을 내딛으면 어디에든 가 닿는다는 걸 알려주는 것 같았다. 계속 싸워야 언젠가는 이길 수 있고, 움직여야 어디든 도달한다.


달리기에 데드 포인트라는 게 있다. 달리다 보면 숨도 가득 차고, 온몸이 달리기를 포기하고 싶은 상태가 되는데 매번 2.5킬로미터가 고비였다. 몇 번의 데드 포인트에서 멈추고 싶은 위기를 겪었지만 어떻게든 달리기를 끝냈다. 이제는 데드 포인트가 다가오는 느낌이 들면 페이스를 약간 늦추고 깊게 호흡한다. 자세를 펴고 손을 털며 긴장을 푼다. 어떤 달리기든 데드 포인트를 맞이하게 된다. 무리해서 억지로 오르막을 넘으려 하는 것보다 내 상태를 알고 무리하지 않고 빠져나가면 나머지 구간은 훨씬 수월하게 완주할 수 있다. 중요한 건 계속 발을 옮겨가는 것이다. 우울감에 몸부림치며 지나온 시간도 데드 포인트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가장 힘들게 나 스스로와 뜨겁게 싸우던 시간. 멈추는 대신 나를 어떻게든 움직이고, 나에게만 집중하며 나를 도닥였던 시간.


나의 달리기에는 딱 두 가지 목표가 있다. 완주하기, 다치지 않기.

남보다 더 빨리 달리는 것보다, 기록을 세우는 것보다 나만의 100이라는 숫자에 닿을 때까지 꾸준히, 뜨겁게 달리고 싶다.



웹진 <2w 14호 내 생의 뜨거운 순간>에 기고한 글입니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76854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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