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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Nov 17. 2018

뜻이 모호하지 않은 문장을 써야 한다

    글을 쓰는 것은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다. 문법에 맞는 문장을 써야 하는 것도 문법적인 문장이라야만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뜻이 분명하지 않은 문장은 비문법적인 문장이기 때문만은 아니고 여러 다른 이유가 더 있다. 뜻이 두 가지로 해석되는 문장, 논리적이지 않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 사실관계와 부합하지 않는 문장 등도 모호한 뜻으로 말미암아 독자를 혼란에 빠뜨린다. 좋은 글은 뜻이 명확하게 드러나서 독자가 막힘 없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글이다. 반대로 무슨 뜻일까 하고 독자로 하여금 의문을 품게 만드는 글은 좋지 않은 글이다. 아래 문장들은 뜻이 모호해서 독자가 답답함을 느끼게 되는 사례들이다. 


국민은 별 관심도 없는 새누리당은 매일 자기들끼리 치고받는다.     


    뜻이 두 가지로 해석되는 문장을 중의적인 문장이라 한다. '국민은 별 관심도 없는 새누리당은 매일 자기들끼리 치고받는다'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국민이 새누리당에 관심이 없다는 뜻과 새누리당이 국민에게 관심이 없다는 뜻이 그것이다. 둘은 전혀 뜻이 다르다. 글쓴이가 무엇을 의도했는지를 문장만 놓고는 알 수가 없다. 따라서 독자는 어떤 뜻인지 궁금해할 수밖에 없다. 중의적인 문장은 바람직하지 않다. 뜻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만일 '국민에게 새누리당이 별 관심이 없다'는 뜻을 말하고자 한다면 '국민은'이라 할 게 아니라 '국민에게는'이라고 하는 게 좋다. 그래야 중의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 '국민이 새누리당에 관심이 없다'는 뜻을 말하고자 한다면 '국민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새누리당은'이라고 해야 뜻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국민이 별 관심없어하는 새누리당은'이라고 할 수도 있다.      


국민에게는 별 관심도 없는 새누리당은 매일 자기들끼리 치고받는다.  

   

국민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새누리당은 매일 자기들끼리 치고받는다.   

            

    다음은 문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무슨 말인지 의아함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문장이다.


직원들은 검찰에 압수당 휴대전화를 다시 구입했고 심지어 커피 값까지 법인카드로 내고 있다고 한다.   

   

    '검찰에 압수당한 휴대전화를 다시 구입했고'는 비문법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검찰에 압수당한 휴대전화'는 되돌려받으면 받았지 다시 구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표현은 논리적이어야 한다. '검찰에 휴대전화를 압수당해 새로 구입했고'라고 한다면 의문은 사라진다.      


직원들은 검찰에 휴대전화를 압수당 새로 구입했고 심지어 커피 값까지 법인카드로 내고 있다고 한다.               


    다음은 문맥에 어울리지 않는 연결어미가 쓰임으로써 뜻이 모호해진 문장이다.


불이 상가 건물에서 발생하긴 했어도 자칫 초고층으로 불이 번졌다면 대형 참사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2017년 2월 경기도 동탄에서 발생한 화재 사고에  관해 쓴 신문 사설의 예문이다. '불이 상가 건물에서 발생하긴 했어도'와 그 다음에 이어지는 '자칫 초고층으로 불이 번졌다면 대형 참사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는 의미상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았다. '-어도'가 양보나 가정의 뜻을 지니는 연결어미인 만큼 '불이 상가 건물에서 발생하긴 했어도' 다음에 '인근 초고층 주택으로 번지지 않아 대형 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 또는 '인근 초고층 주택으로 번지지 않아 대형 참사를 피할 수 있었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등과 같은 말이 왔다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요컨대 위 예문에서 '했어도'의 '-어도'가 쓰일 이유가 없었다. 그냥 '상가 건물에서 발생한 불이 자칫 초고층으로 번졌다면 대형 참사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라고 하면 충분했다. 만일 연결어미를 쓴다면 '-어도'가 아니라 '~으니 망정이지'가 어울린다. 즉 '불이 상가 건물에서 발생했으니 망정이지' 또는 '불이 상가 건물에서 나고 그쳤으니 망정이지'라고 할 때 이어지는 말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문맥에 맞는 연결어미를 써야 글의 흐름이 자연스럽고 의아함을 자아내지 않는다.   

  

상가 건물에서 발생한 불이 자칫 초고층으로 번졌다면 대형 참사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불이 상가 건물에서 나고 그쳤으니 망정이지 자칫 초고층으로 불이 번졌다면 대형 참사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음 예는 도무지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힘든 문장이다.


비선 실세의 교육농단을 방조한 교육자들의 각성은 물론이거니와 이를 가능하게 한 시대착오적인 학사행정과 대학문화 등 여러 가지를 돌아보게 하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비선 실세의 교육농단을 방조한 교육자들의 각성은 물론이거니와'라고 했는데 이 말이 이어서 나오는 어떤 말과 호응하는지 찾기 어렵다. '비선 실세의 교육농단을 방조한 교육자들의 각성을 돌아보게 하는'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데 '비선 실세의 교육농단을 방조한 교육자들의 각성을 돌아보게 하는'이 자연스럽지 않다. '각성'은 '촉구'하면 했지 '돌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돌아보게'와 호응할 수 있도록 '각성' 대신에 '행태' 같은 말로 바꾸어야 한다. 단어 선택을 잘못 함으로써 문장 전체의 뜻이 불분명해진 사례다.   


비선 실세의 교육농단을 방조한 교육자들의 행태는 물론이거니와 이를 가능하게 한 시대착오적인 학사행정과 대학문화 등 여러 가지를 돌아보게 하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대충 쓰더라도 독자가 글쓴이의 의도를 알아채리는 경우가 물론 있다. 그러나 이왕이면 정확하게 표현해야 함은 물론이다. 다음 예문도 정확한 표현은 아니어도 대체로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앞뒤가 맞지 않아 의아함을 피할 수 없다.


이제 국민이 대통령에게서 듣고 싶은 말은 '대화하고 협상해보되 결국 안 될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위 문장에서 '대통령에게서 듣고 싶은 말은'과 ''대화하고 협상해보되 결국 안 될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는 의미상 서로 호응하지 않는다. '대통령에게서 듣고 싶은 말은'과 호응하는 말은 ''대화하고 협상해보되 결국 안 될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대한 답이다'이거나 ''대화하고 협상해보되 결국 안 될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대해서다' 또는 ''대화하고 협상해보되 결국 안 될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대한 것이다'이다. 만일 ''대화하고 협상해보되 결국 안 될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를 살리고자 한다면 앞에서 '국민이 대통령에게 묻고 싶은 말은'이라고 해야 한다. 무릇 문장성분들은 서로 의미상 호응해야 한다. 

     

이제 국민이 대통령에게서 듣고 싶은 말은 '대화하고 협상해보되 결국 안 될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대한 답이다.     


이제 국민이 대통령에게 묻고 싶은 말은 '대화하고 협상해보되 결국 안 될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찬찬히 풀어서 쓰기보다 최대한 짧게 압축해서 쓰려다가 그만 뜻이 모호해지는 경우가 있다. 다음은 그런 예다.


문제 교사의 개인 일탈을 넘어 한국교총을 비롯한 교단의 뼈아픈 자성과 자발적인 대책을 촉구한다.  

   

    '한국교총을 비롯한 교단의 뼈아픈 자성과 자발적인 대책을 촉구한다'는 앞에 나오는 '문제 교사의 개인 일탈을 넘어'와 의미상 호응한다고 보기 어렵다. '문제 교사의 개인 일탈을 넘어'를 '문제 교사의 개인 일탈로 봐넘길 문제가 아니다.' 또는 '문제 교사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등과 같이 독립된 한 문장으로 만들어야 이어지는 '한국교총을 비롯한 교단의 뼈아픈 자성과 자발적인 대책을 촉구한다'와 호응한다. 최대한 압축적으로 표현하려다 보니 위 예와 같이 두 문장으로 나누어야 할 것을 한 문장으로 만들었겠지만 앞뒤가 잘 호응하지 않는다.     


문제 교사의 개인 일탈로 봐넘길 문제가 아니다. 한국교총을 비롯한 교단의 뼈아픈 자성과 자발적인 대책을 촉구한다.     


문제 교사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한국교총을 비롯한 교단의 뼈아픈 자성과 자발적인 대책을 촉구한다.              

 

    글을 쓰는 궁극적인 목적은 내 생각을 남에게 잘 전달되도록 하는 것이다. 내 생각이 남에게 잘 전달되게 하기 위해서는 문장이 문법적이어야 함은 물론 뜻이 불분명해지게 만드는 모든 요소를 없애야 한다. 뜻이 모호한 문장을 쓰지 않으려면 평소에 반듯한 문장을 쓰는 훈련을 꾸준히 쌓아야 함은 물론이다. 그리고 글을 쓰고 나서 독자 입장에서 내가 쓴 글을 읽어보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다. 즉 쓴 글을 찬찬히 읽어보고 의문스러운 부분은 없는지,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는 데 어려움은 없겠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다. 쓸 때는 몰랐지만 다시 읽어보니 무슨 뜻인지 분명치 않은 대목이 발견되었다면 고치고 다듬어야 한다. 그래서 그 누가 읽더라도 뜻이 분명히 이해되겠다 싶을 때 비로소 탈고를 해야 한다. 스스로 판단하기 어려우면 다른 사람에게 읽혀보고 의견을 듣는 것도 바람직한 태도다. 뜻이 모호한 글을 써서 독자로 하여금 의문을 품게 하고 해석에 어려움을 겪게 하는 것은 독자에 대한 예가 아니다. 글 쓰는 목적도 이루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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