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마술지팡이와 마술주문
며칠 전 분리수거 쓰레기를 버리고 와서 아내에게 버럭 화를 냈다. "이걸 또 꺼내놨냐? 제발 버릴 건 좀 버리자!!!" 플라스틱 상자 하나를 버리려고 쓰레기통에 넣어놨었는데, 집에 와보니 그 상자가 다시 꺼내져 있는 게 아닌가. 그 상자를 마주치자 이성의 끈이 툭 끊어져 버린 채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감정의 고삐가 풀리면서 아내를 향해 거친 단어들을 쏟아냈다. 무차별적이고 일방적이었다. 아내는 고개를 숙인 채로 내 화를 받아내고 있었다. 그때 아내는 아들과 책상에 앉아 놀이를 하던 중이었다.
아내와는 물건 정리하는 일로 종종 다투곤 했다. 결혼 생활 12년이 지났어도 각자 만들어 놓은 기준의 차이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나는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버리고 싶어 하는 반면, 아내는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이라야 비로소 버리는 편이다. 간혹 내가 물건을 버리려고 할 때면 아내는 부리나케 달려와 내 앞을 가로막곤 했다. 그리고는 하나하나 물건 검사를 하면서 "이렇게 멀쩡한 걸 왜 버리냐!?"라며 나를 나무라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나도 지지 않고 큰 소리로 받아쳤다. "쓰지도 않는 걸 뭐 하러 놔두는 거야? 그럴 거면 정리나 잘하든지!"라고. 평생 사랑하겠다는 다짐이 무색해질 만큼, 이 작은 기준의 차이는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우리 관계를 불안하게 만들곤 했다.
아내에게 화를 쏟아내고도 좀처럼 감정이 가라앉지 않았다. 화를 식힐 겸 목욕하러 들어갔는데 아들도 같이 하겠다며 따라 들어왔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 보니 아내에게 화내는 장면을 아들은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었다. 화를 낼 당시에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자식에게 부모는 그 자체로 가장 중요한 환경이 된다고 하던데. 아빠가 엄마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쏟아내는 상황을 보며, 5살 아들은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받았을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목욕시키며 아들에게는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아들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으이그... 엄마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라고.
아내에게 화를 내는 건 쉬웠는데 그 뒤에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는 막막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해맑게 웃어볼까, 일단 마주치지 않게 방으로 후다닥 들어가서 시간을 좀 벌까, 아니면 알몸으로 나가서 이상한 춤을 추며 웃겨볼까 별의별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혼자서는 생각 정리가 되지 않아서 수건으로 몸을 닦고 있는 아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아빠가 엄마한테 어떻게 사과하면 좋을까?"라고 묻자, 아들은 한숨을 한 번 쉬더니 "그냥 가서 사랑한다고 말해"라고 무심히 답을 했다. 군더더기 없이 바람직한 답변이라 생각했다.
욕실을 나와서 아들이 조언해 준 대로 아내에게 다가가 사랑한다고 말을 했다. 그리고 화를 내서 미안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아내는 두 팔을 벌리고는 한 번 안아보자고 했다. 포옹은 우리 부부가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일종의 의식과도 같다. 나도 팔을 벌려 아내를 품에 안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들도 잠옷을 입다 말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옆에 있던 의자에 올라와 엄마아빠를 말없이 두 팔로 안아주었다.
포옹을 하고 나서 아내와 아들은 서로 신기하다는 듯 말을 꺼냈다. "어? 진짜 마술 주문처럼 이루어졌네?"라고. 알고 보니 내가 아내에게 화를 내고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 아들이 마술지팡이를 들고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고 한다. 그날 오전에 마술공연을 보고 선물로 받은 장난감 지팡이였다. 그러면서 (혹여나 아빠가 들을까) 소곤대는 목소리로 마술주문을 반복해서 외웠다고 했다. "엄마 말 잘 듣는 아빠가 되어라! 얍!" 당시에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아들이 뒤에 따라와서 마술주문을 외우고 있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뒤늦게 그 말을 들으니 감정적으로 행동했던 나 자신이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아무래도 아들의 마술주문이 효과가 있나 보다. 아들의 마술지팡이를 볼 때면 마음에 회초리를 맞은 듯이 얼얼하게 쓰라리다. 차라리 단단한 회초리로 종아리를 세게 맞았으면 금세 잊어버렸을 텐데...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들의 마술주문이 뇌리에 남아 있다. 앞으로도 아내와 크고 작은 다툼을 반복하며 살아가겠지만, 그때마다 아들의 마술주문이 내 이성을 붙잡아주기를 기대해 본다. "엄마 말 잘 듣는 아빠가 되어라! 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