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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회중년생 Oct 22. 2022

민석

10만 원 - 두 번째




“......, 강남역입니다.”


버스 안내방송 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익숙한 정류장 이름이 호명되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손은 가방을 움켜쥐고 무릎엔 힘이 들어갔다. 겨우 1초 만에 내 몸은 내릴 준비를 끝냈지만, 벌써 1시간째 내 뇌는 여전히 메시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삐-

하차 문이 열렸다. 바쁜 직장인들이 나에게서 도망치듯 앞다퉈 버스를 빠져나갔다. 나는 맨 뒷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하차 문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번호만 바뀌었을 뿐, 대학생 때도 나는 같은 노선버스의 맨 뒷줄 인도 쪽 끝자리에 타고 여기서 내려 환승해서 등교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삐-


“야, 왜 눌러~~ 우리 다다음에 내리잖아!”
“미안해~ 형.”


떠오른 강석이의 얼굴은 내 핀잔에도 웃어주던 대학생 때 모습 그대로였다.

집이 같은 방향이어서 종종 이 버스에서 마주쳤던 기억이 살아났다. 재수해서 동기들보다 한 살 많았어도 서로 ‘야’라고 부르며 격의 없이 지냈지만 강석이는 가끔 나를 형이라고 불렀다.

10년 만에 보내온 메시지가 온라인 청첩장이었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욕 한 바가지 먼저 해 줬겠지만, 진심 어린 축하도 함께 해줬을 거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까똑-

팀장이었다.


어디야 강 대리. 사장님 지금 옆에 기획팀 돌고 계셔

빨리 와! 들키기 전에 


정신을 차려보니 9시 4분.

회사로 걸어가는 길목에 혼자 서있었다. 10분이면 충분한 거리를 20분 가까이 배회하다니. 지각이었다. 회사가 있는 건물까지는 전속력으로 뛰고, 3층 문 앞에 가방을 살며시 내려두고는 고양이보다 은밀하게 움직여 우리 팀 입구까지 겨우 당도했다.

팀장 잔소리도 듣기 싫지만, 사장님께 걸리면 정말 피곤해진다. 그때, 바로 등 뒤에서 사장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인 것처럼 최대한 침착하게 걸어가 내 의자에 스르륵 안착했다. 내 컴퓨터는 누군가 이미 켜놓았다. 태연하게 마우스를 잡으며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길게 뿜었다. 천만다행이었다.


“지각해놓고 오후 반반차라니 아~주 뻔뻔해~”
“진짜 중요한 일이 생겨서 그래요. 월요일에 커피 쏠게요. 마카롱도!”


2시간 연차를 내고 일찍 나섰다. 급한 미팅 대비용으로 회사 캐비닛에 걸어 둔 검은 양복으로 바꿔 입고 출근 때처럼 살며시. 사유는 집안일이라고 해뒀다. 대학 동기의 상이라고 얘기하면 이것저것 물어볼 게 뻔한 팀장에게 기가 빨리기 싫어서도 있었지만, 아직 입 밖에 내기엔 내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탓이 더 컸다. 1층 회전문을 뒤로하면서 호흡을 가다듬고 강석이 이름으로 온 메시지를 다시 한번 읽었다.
윗부분 편지 형식은 강석이가 직접 쓴 글이 확실한 것 같은데 부고의 주인공도 강석이라니 마음이 착잡했다. 오전엔 경황이 없어 지나쳤었나?

끝까지 살펴보니 발인 날짜 아래에는 덧붙인 메시지가 하나 있었다.



일일이 유선상으로 연락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고 김강석의 동생 김민석입니다.
형님 핸드폰 연락처 ‘친구’ 폴더에

저장된 분들께는 연락드려야 할 것 같아

부득이하게 형님 스마트폰 상에서

메시지로 알려드립니다. 



졸업한 지 10년이 지나 이제는 연락하는 친구도 거의 없긴 했지만, 대학 동기의 죽음은 처음이었다. 어릴 적엔 친구의 조부모상이 가끔 있었을 뿐이었는데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 대상이 점차 친구의 아버지와 어머니로 젊어지더니 급기야 ‘친구’ 본인의 부고 알림이라니.

‘죽음’은 오늘 아침을 기점으로 결국 ‘내 세대’ 앞까지 성큼 다가오고 만 것이다.


은행 ATM 앞의 줄도 서서히 줄어들어 드디어 내 차례가 다가왔다. 나는 IC 카드를 넣고 고민 끝에 오만원권 2장을 인출했다.

운 좋게도 빳빳한 신권이 나왔다. 사실, 결혼식이나 상갓집이나 절친은 30만 원, 그 정도는 아니지만, 꾸준히 보는 친구는 10만 원, 나머지 그냥 친구는 5만 원으로 통일하는 것이 내 나름의 기준이었고, 그 기준대로라면 10년이나 연락이 없어 이름조차 가물거리는 친구는 5만 원이 당연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같은 나이를 살았던 친구 당사자의 죽음에 대한 동질감에, 내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까지 더해진 금액이 5만 원일 수는 없었다.


나는 회사에서 미리 챙겨온 부의금 봉투에 10만 원을 넣고, 다시 그 봉투를 양복 재킷 왼쪽 안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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