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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회중년생 Oct 22. 2022

베프

10만 원 - 다섯 번째



까똑-

정섭이었다.


-민석이한테 전.화.왔었어.
-누구긴 누구야. 강석이 동생. 아, 넌 잘. 모.르.나?
-강석이가 나한테 편지를 써둔 게 있다고 동생한테 꼭 전해달라고 부탁했다는데.

-사실 그 자식이랑 몇 년 전에 좀 다툼이 있었어.
-나랑 끝까지 풀고 싶었던 것 같아서 정말 미안하네.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해줄게.


제목이 있다면 ‘동기와의 아름다운 추억’이었을 외장하드와의 동기화가 뚝- 끊어지는 소리가 머릿속까지 들렸다.

그럼 그렇지. 강석이가 거의 유일하게 연락하는 놈이 정섭이었는데 당연히 10년이나 연락 끊긴 나만 친구로 생각할 리가 없지. 밝았던 스마트폰 화면이 어두워지자 검은 액정에 반사된 멍한 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진짜 친구니 뭐니 하며 혼자 우쭐댔던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어디라도 숨고 싶었다. 뒤를 이어 파도처럼 몰려오는 찌질한 질투심.


나의 경우처럼 단체 문자가 아닌, 친동생으로부터 직접 걸려 온 전화라니.

두 사람 사이에 있었다는 다툼의 자.세.한. 내용도 편지의 내용도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강석이의 스마트폰에는 동생조차 잘. 모.르.는. 고작 나 정도의 사람들로 구성된 ‘친구’ 폴더만 있을 리가 없었다.

긴밀하게 연락하고 지내는 알짜 친구들만 모아놓은 ‘절친’ 폴더가 분명히 있을 것만 같았다. 급기야는 정섭이만을 위한 ‘베프’ 폴더까지 존재했을 거라는 상상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상상은 확신이라는 비수가 되어 내 작은 마음에 상처를 내기 시작했다. 그 상처치료를 위한 비용은 5만 원이었다. 프로그래밍된 로봇처럼 내 오른손은 순식간에 재킷 안을 훑고 지나갔다.


결국, 내 왼쪽 안주머니 부의금 봉투 안에는 다시 오만 원권 1장만이 남겨졌다.


드디어 대한대입구역에 도착했다.

세월이 지났어도 자주 가던 주변 상점들의 이름이 바뀌었을 뿐, 대학생 시절 눈감고도 다니던 길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개찰구를 지나 1번 출구로 나와서 계단을 내려가면 만나는 건널목 신호등 앞에 서서 10년 전과 같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신선한 공기가 마스크 필터를 지나 콧속으로 타고 들어왔다. 곧 머릿속이 맑아졌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장례식장 가는 길이 학교 갈 때와 똑같아서 감상에 젖었을 뿐, 부의금 하나에 너무 고민할 필요는 없겠다 싶었다. 강석이에게도 본인의 기준에 따라 ‘친구’ 폴더가 있듯, 나에게도 정해놓은 폴더가 있었다.

단지 그냥 친구는 5만 원. 내가 세운 기준대로 하면 간단한 일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랗고 맑았던 오늘 하늘처럼 신호등도 마음도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건너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평소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학생은 물론, 직장인들도 많이 찾는 지역이지만 코로나 이후로 영업시간과 인원 제한 등이 생겨 요즘은 크게 붐비지 않았는데 아직 퇴근 시간 전인 데도 확실히 많았다.

편의점 앞에선 점원이 방금 세운 진열대 위에 초콜릿 상자를 예쁘게 배치하고 있었다. 그제야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생각났다.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 설레는 표정의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걸음을 멈췄다. 내가 건너온 건널목의 신호등도 다시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강석이 생일이 2월 14일이었던 게 생각났다.

특별히 적어두거나 기억해둔 것은 아니지만 보통 이런 날이 생일인 경우는 한 번 들으면 잊히지 않으니까. 동시에, 생일 때마다 밸런타인데이에 여자친구도 없다며 선물 대신 소개팅 해달라던 녀석의 얼굴도 떠올랐다. 하이고. 어떻게 이 녀석은 매년 잊지도 못하게 이런 날 왔다가 같은 날 이렇게 가냐. 얼굴도 모르는 사이지만 남은 부모님과 동생이 너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석이 가족에게 2월 14일은 평생 마음 복잡한 날이 되고 만 것이다. 촉촉해질 뻔했던 눈을 껌뻑거리며 멈췄던 발걸음을 옮겼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봉투에는 다시 오만 원권 2장이 들어가 있었다. 이쯤 되면 내 오른손은 완전 자동화 시스템이었다.


대학교와 병원 입구가 나뉘는 정문으로 들어서는데 왼손에 진동이 연이어 느껴졌다.

스마트폰이었다. 전화였고 정섭이었다.


“어디냐? 나 방금 장례식장 도착했어.”
“갑자기 일이 미뤄져서 바로 나왔지. 너 얼굴도 볼 겸.”

“그래? 같이 들어가면 되겠네. 앞에서 기다릴게.”


회사가 바로 병원 코앞인데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일 온다더니. 뭐야, 정말 일이 미뤄 진 거 맞아? 내 얼굴을 보긴 뭘 봐. 베프 강석이가 남겨뒀다는 편지가 보고 싶어서 만사 제쳐두고 달려온 거겠지. 베프 아니면 서러워서 살겠나. 가라앉았던 뾰루지가 재발하듯 심술궂은 마음이 삐죽 솟아올랐고 내 심리상태의 변화는 그대로 오른손에게 전달되었다.

순식간에 봉투 안에서 또다시 오만 원권 1장이 빠져나갔다.


병원이 있는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서 흥분을 가라앉히며 생각해봤다. 이상했다. 평소 같았으면 절대 질투심이 생길리 없는 사이였다. 나는 강석이와 대학 졸업 후 한 번도 서로 연락한 적이 없었고, 그 점에 대해 아쉬워한 적도 없었다. 강석이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대학교라는 매개체가 있어서 유지되었을 뿐인 관계였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사실 미안한 얘기도 아니다. 강석이 역시 나를 그 정도의 친구로 생각했을 것이 뻔하니까. 보통 이런 관계는 졸업과 동시에 유효기간이 끝나고 만다. 반면에 주변에서 보기에 정섭이는 내성적인 강석이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렇다고 정섭이에 대한 질투인가 하면 그것도 전혀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언제나 먼저 연락해오는 쪽은 정섭이었으니까. 순간, 마스크 밖에서도 보일 정도로 내 얼굴이 빨개지는 게 느껴졌다. 답이 나왔다. 질투심이 아니었다. 내가 흥분했던 원인은 결국 돈 때문이었다. 내 ‘감성’이 울컥해서 순간적으로 정한 부의금 10만 원을 내 ‘이성’이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내 ‘이성’이 정한 강석이는 ‘그냥 친구’. 아닌 척했지만 처음부터 5만 원이었다. 다만, ‘이성’이 ‘감성’을 설득하기 위한 구실이 필요했던 것이다. 오만 원권 1장을 빼기 위한 자기합리화의 구실.


다시 봉투 안으로 오만 원권 1장을 밀어 넣었다. 아무래도 부의금으로 5만 원을 내고 나온다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아서였다. 강석이 가족과 정섭이는 꿈에도 이런 내 심경을 알리 없겠지만 잘못한 일도 없는데 혼자서 밑지는 기분이 드는 건 싫었다. 손끝의 감촉만으로 알 수 있는 오만 원권 2장의 부활. 이제 봉투 안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왔어? 들어갈까?”
내 자기합리화 과정에 자신이 이용당했던 사실을 알 리 없는 정섭이는 나를 반겼다.


“근데 너 넥타이 안 했냐?”
그러고 보니 목이 서늘했다. 다행히 검은색 넥타이는 들고 온 가방 안에 있었다. 회사에서 급하게 양복을 갈아입느라 넥타이는 도착해서 매려고 챙겨뒀던 것이 생각났다. 기다리는 정섭이에게 가방을 맡기고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 앞에 섰다. 셔츠는 맨 위 단추가 풀린 채였다. 오늘 아침 출근 전에 채울지 말지로 고민했던 일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맨 마지막에 채우니까 끝단추가 맞지.”
멍해진 의식 너머 거울 속에서 강석이가 나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같은 과 선배의 소개로 레스토랑 일일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양복으로 갈아입던 탈의실이었다. 강석이는 그 날처럼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답답해 보이니까 풀어둘지, 깔끔해 보이도록 채울지. 내 인상을 결정하는 단추니까 항상 맨 마지막까지 고민하게 되는 거지. 너도 그렇지 않냐?”


그제야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맨 위에 있지만 언제나 맨 마지막에 채우는 단추를 꼭 잠그고 셔츠의 깃을 세웠다. 그리고 그 위로 검은색 넥타이를 자물쇠처럼 단단히 묶었다. 내가 봐도 인상이 깔끔해 보였다. 마지막 강석이에게도 깔끔해 보이고 싶었다.

나는 거울 앞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라도 하는 사람처럼 오른손을 들어 왼쪽 양복 재킷 가슴 위에 가져다 댔다. 손끝으로 안주머니 봉투의 존재를 느끼면서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그래, 깔끔하게 10만 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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