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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회중년생 Oct 22. 2022

초콜릿

10만 원 - 마지막



“산아, 너 얼마 할 거냐?”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정섭이가 내 팔을 구석으로 살짝 끌더니 나지막한 소리로 물어왔다. 물어보긴 했지만 사실 내 대답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정섭이는 내 입이 움찔하기도 전에 자신이 정해놓은 답을 빠르게 이어서 말했다.


“나 5만 원만 할 건데 같이 맞춰 내자고.”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렸다. 제시한 금액의 크기 때문이 아니었다.

5만 원이냐 10만 원이냐로 오는 내내 ‘추억’과 ‘현실’이 난무하고 ‘감성’과 ‘이성’이 난투를 벌였는데, 정섭이의 쿨하다 못해 무심한 말투를 듣자 겨우 잔잔해진 호수에 바위를 집어 던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정섭이한테는 일단 알았다고 말했지만, 강석이가 기다리는 장례식장 복도 맨 끝 108호실까지 걸어가는 동안 이미 내 안은 다시 전쟁터였다.


정섭이도 5만 원 내는데 내가 10만 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지.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가 그렇게 고민해서 10만 원으로 결정했는데 여기서 또 바꾸는 건 너무 찌질해. 그냥 10만 원이 답이지.

근데 가만 생각해봐. 이미 같이 맞춰내는 데 동의해놓고 나 혼자 10만 원은 진짜 정섭이를 무시하는 거지. 양아치도 아니고. 5만 원으로 가자!
양아치는 무슨. 그건 정말 핑계지. 어차피 강석이 가족을 다시 볼 일도 없고 정섭이가 내 부의금 봉투를 들여다볼 것도 아니잖아. 그냥 소신대로 10만 원...
아, 너무 머리 아파. 이제 얼마인지도 헷갈리네. 처음으로 돌아가서 내 평소 기준대로 그냥 5만 원만 하자. 이제 더 이상 고민 끝. 정말 여기까지. The end.


2장에서 1장으로. 1장에서 2장으로. 그리고 다시 1장으로. 아니, 다시 2장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따라서 내 오른손은 정신없이 움직여댔고, 오른손의 현란한 움직임을 따라서 봉투 속 오만 원권도 들락날락거렸다. 내 오른손이 계속 재킷 안쪽에서 꿈틀거리는 바람에 정섭이가 어디 불편하냐며 물어보는 위기도 있었지만, 가까스로 복도 끝에 다다랐고, 마지막 순간에 1장을 빼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이 내렸다.


어느새 108호 앞이었다.
안쪽 정면으로는 내 기억보다 조금 나이 든 강석이가 액자 안에서 우리 둘을 반기고 있었다. 활짝 웃는 강석이의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내리자 입구 바로 앞에 있는 부의함이 눈에 들어왔다.

정섭이가 망설임 없는 동작으로 자신의 봉투를 밀어 넣고는 내 쪽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방명록에 너 이름도 같이 쓴다.”
나는 정섭이 뒤를 따라 부의함 앞으로 걸어가서 오른손을 왼쪽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 봉투를 꺼냈다.

회사 근처 은행에서 주머니에 넣어둔 이후로 처음 다시 마주한 부의금 봉투는 혹사당한 듯 여기저기 주름이 많이 가 있었다. 나는 재빠르게 함 속으로 밀어 넣었다.

알 수 없는 미안함은 있었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강석이에게도 그리고, 봉투에게도.


그 이후엔 빨리 자리를 떠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간단한 절차를 마치고 강석이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자마자 나는 먼저 간다며 슬며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어차피 가족들은 나를 잘 몰랐고, 정섭이는 강석이가 남겨둔 편지를 확인해야 했기 때문에 다행히 아무도 나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미안하지만 오늘 정말 중요한 약속이 있다고 정섭이에게 메시지도 하나 남겼다. 칼날처럼 차가운 바람을 뚫고 정문까지 뛰듯이 걸어 나왔다.


흐---읍, 후------

찬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가 아주 길게 내뱉었다. 내 안의 찌꺼기가 다 나오길 바라면서. 

이제 정말 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오른쪽 손가락이 욱신거렸다. 확인해보니 검지 중간에 종이에 베인 듯한 상처와 함께 희미한 핏자국이 나 있었다.

아팠을 텐데 여태 못 느낀 걸 보니 내내 긴장했었나 보다. 봉투와 오만 원권 사이를 수없이 들락날락거렸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잠시 부끄러워졌지만, 천천히 반성할 시간은 없었다. 빨리 회사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고 다시 약속 장소로 이동해야만 했다. 오늘 저녁은 정말 내 인생에서 중요한 날이니까.


역으로 향하는 길에 보이는 아무 편의점에 들어가 밴드를 골라 계산대에 섰다. 보기 싫은 상처는 한시라도 빨리 가리고 싶었다.


꼬륵-
그러고 보니 오늘 제대로 먹은 것이 없었다.


꼬륵- 꼬륵- 꼬르륵---
연이은 내 배의 울음소리에 점원의 마스크는 미세하게 들썩였고 눈은 웃고 있었다. 민망해진 나는 편의점에 걸려 있는 빨간 불빛의 큼지막한 벽걸이 전자시계로 눈을 돌렸다.

장례식장에서 급히 나온 덕분에 바로 가면 약속 시간엔 늦지 않을 시간이었다. 나는 계산대에 밴드를 그대로 두고는 진열대 쪽으로 가서 예쁘장한 리본이 달린 밸런타인데이 초콜릿 패키지를 하나 집어 들었다.

배고프니까 몇 개 먹고 나머지는 있다 만날 선배와 소개받는 지인분께 드릴 생각이었다. 센스있다고 좋아하겠지?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오늘은 밸런타인데이다. 그리고 큰 회사로의 이직 기회가 있는 즐거운 날이다.
나는 다시 계산대에 서서 가방 속 지갑을 꺼내려다가 마음을 바꿔 왼쪽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남아 있을 오만 원권 1장으로 계산할 생각이었다. 평소라면 당연히 카드로 계산하겠지만 오늘 남겨진 이 돈은 빨리 써버리고 싶었다. 그래야 정말 끝일 것 같았다.


사-악---
아, 또 베었나 보다. 아직 밴드로 가리지 못한 검지의 상처에 종이가 날카롭게 스치는 느낌이 났다. 짜증이 밀려왔다. 나의 오른손도 돈에게 화풀이하고 싶었는지, 구겨지든 말든 아무렇게나 움켜쥐고는 계산대 점원에게 던지듯이 건넸다. 초콜릿이 얼마인진 몰라도 밴드값까지 합쳐봐야 5만 원을 넘길 리는 없었다.


“저, 고객님~”
구겨진 지폐를 펴서 계산하려던 점원이 나를 불렀다.
“10만 원 내셨는데요. 여기 5만 원은 먼저 돌려드릴게요.”

점원이 펼쳐서 보여준 지폐는 틀림없는 오만 원권 2장이었다.


어? 2장?
어디서 잘못된 거지?


그럼, 내가 부조금으로 얼마를 낸 거야?
믿을 수 없었다. 분명 오늘 내 재킷 왼쪽 안주머니에는 부의금 봉투와 오만 원권 2장 외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장례식장에서 봉투에 오만 원권 1장을 담아서 냈다면, 내 왼쪽 안주머니에는 오만 원권 1장만이 남아있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 10만 원이라니. 어디서 계산이 꼬였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부의함에 넣은 것은 빈 봉투임이 틀림없었다. 반사적으로 시계를 봤다. 지금 장례식장으로 돌아갔다 가면 약속 시간에 늦을 것이 분명했다.


머리도 다리도 멈췄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계산대 위에서는 구겨진 신사임당이 나를 비웃고 있었다.


꼬륵- 꼬륵- 꼬르륵---

점원의 눈도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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