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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회중년생 Oct 22. 2022

1일 낮

100일 - 첫 번째


휘잉- 툭.


붙잡힌 독립운동가의 순교 같다고 생각했다. 바싹 마른 채 만세 자세로 널려 있던 티셔츠 한 장이 베란다 창문 사이로 기습 공격해온 칼바람에 힘없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태풍이 오려나.”


거실 소파에 누운 자세로 눈동자만 살짝 돌려 이 광경을 목격한 현민은 다시 스마트폰으로 눈길을 옮기며 무심하게 말을 공중에 툭 던졌다.


“이제 4월인데 무슨 태풍?”
창문을 닫다 말고 하늘이 어이없다는 듯 현민의 말을 툭 걷어찼다.


“그런가. 아니면 비행기가 지나가나?”
봄 태풍 망언에 이어 공항 근처도 아닌데 비행기라니. 진짜 이 인간 말은 생각이 결여된 단지, 소리임이 틀림없다.

하늘이 짜증 난 건 오늘이 100일인데도 이벤트는커녕 기억조차 못 하는 현민 때문만은 아니었다. 작년 크리스마스 무렵 소개팅으로 만나자마자 불꽃이 튀어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새해부터 바로 동거를 감행한 자신의 형편없는 안목에 대한 책망이 더 컸다. 하늘은 창문을 마저 닫고 거실로 들어오며 잠시나마 들뜬 달력을 꾹 눌렀다. 4월 1일. 날씨도 만우절스럽네.


띠-리-링.
리모컨 신호음과 함께 어김없이 TV는 밝아졌고 또 시끄러워졌다.
“아, 배고파~ 먹을 거 없어?”
현민의 절규 같은 외침에 시계를 보니 이미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때맞춰 하늘의 배에서 천둥이 쳤고, 그 소리가 신호탄이 되어 둘의 배고픔에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TV는 음소거 상태도 아닌데 이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비상사태. 당이 떨어질대로 떨어진 지금, 무언가를 만들어 먹기엔 너무 늦었다. 하지만 뭐라도 반드시 위장으로 밀어 넣어야만 한다. 좀 더 지나면 곧 손이 떨리게 되고, 더 방치했다가는 원초적이고 강렬한 두 인간의 분노가 욕으로 탈바꿈하여 서로의 가슴에 비수로 꽂히는 참사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오직 먹어야만 진정되는 대참사.


현민이 냉장고를 뒤지다가 그제 밤 맥주와 놀아났던 치킨의 잔재를 발견했다. 평소 같았으면 에어프라이어기를 진작에 샀어야 했다는 후회를 시작으로, 냉동도 아닌 냉장 칸에 방치 된 치킨을 팬에 살짝 구워야 냄새가 덜 날지, 전자레인지에 물 한 컵과 함께 돌려야 촉촉할 지로 설전을 벌였겠지만, 지금은 비상사태. 그냥 포장째로 들고 와 거실 테이블에 던지듯 올려두고 들개 두 마리가 되어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닭 본연의 비릿한 냄새가 고개를 들기 시작한 식은 치킨과 김빠진 콜라와 기름 묻은 손가락을 번갈아 가며 정신없이.


“실제상황입니다. 우리 시간으로 오늘 정오. 북극해의 일부인 카라해와 바렌츠해 부근 무인도 여러 개가 위성 상에서 사라진 가운데...”


위장의 비상사태가 끝나자 TV 속 뉴스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현민은 기름이 번들번들한 검지손가락으로 리모컨의 볼륨 버튼을 눌러 키웠다. 화면 좌측 상단에는 붉은색 고딕체로 큼지막하게 [글로벌비상사태 선포]라고 새겨져 있었고, 긴급상황실로 보이는 곳에서 각국 정상들이 화상회의를 하는 장면을 배경으로 아나운서와 관련 전문가 몇이 열 띤 토론을 나누고 있었다.


“현재로서는 오늘 저녁까지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시죠?”
“이번 사태가 진짜 외계인의 소행인지 테러단체의 소행인지는 아직 확인된 바가 없습니다. 다만 글로벌 주요 국가의 수장들에게 동시에 보내진 세 통의 협박성 메일과 이번 북극해에서 일어난 사태의 내용이 일치하기 때문에 현시점에서는 그들이 메일에서 언급한 우리시간으로 오늘 오후 7시가 되어야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외계인? 테러? 지금은 사라진 코로나19의 대유행 시작 시점처럼 현실감 없는 보도 내용에 하늘은 잠이 덜 깬 듯 살짝 멍해졌다. 경험해 본 적 없거나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 발동하는 인간의 본능적인 방어시스템 스위치가 순간 머릿속에서 켜진 것이다. 반면에 현민은 별로 놀랍지 않다는 듯 가볍게 중얼거렸다.


“뭔진 모르지만 재밌겠는데? 어차피 우리나라가 사라진 것도 아니고.”
하늘은 대답이 없었다. 정확히는 현민의 말을 듣지 못했다. 완벽하게 TV에 집중하고 있었다. 뉴스에서 보도하는 사태의 내용을 시간순으로 요약하면 이러했다.



1. 3월 26일. G20 각국 대표들에게 첫 번째 협박성 메일 도착.
 (기존 인류가 사라진 지구에 신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왔다는 내용)
2. G20 대표들 모두 메일을 무시함.
3. 어제. 두 번째 협박성 메일 도착.

(4월 1일 정오(우리시간) 북극해 부근의 섬 중 일부를 사라지게 하겠다는 내용)
4. 역시 모두 메일을 무시함.
5. 오늘(4월 1일) 정오. 섬들이 실제로 사라짐.
6. 사태 발생 직후 세 번째 협박 메일 도착.
(오늘 오후 7시(우리시간) 기존 인류 삭제 시한을 전달하겠다는 내용)


외계인인지 테러 집단인지는 모르지만, 상당히 이기적인 놈들인 건 분명했다.

G20 국가의 대표들이 처음 두 통의 메일을 무시했다고 보도되긴 했지만 가만 보면 3통의 메일 내용 전부가 일방적인 통보형식일 뿐, 의견을 묻는다던가 이쪽에서 무슨 액션을 취할 수 있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회신 주소 하나 없었다. 현민은 지구 정복에 신세계 건설이라니 너무 촌스럽고 식상한 아이디어라며 빈정거렸다. 하늘은 고개를 돌려 시계를 봤다. 3시 43분. 이제 3시간 정도 남았다. 둘은 아무 말 없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거의 동시에 남은 식은 치킨을 입에 밀어 넣었다. 입술은 다시 기름으로 코팅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뉴스는 어이가 없었고, 딱히 다른 할 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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