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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회중년생 Oct 22. 2022

2일

100일 - 세 번째


침실까지 들어온 하얀 햇살이 4월 2일도 무사히 밝았음을 알려주었다.


일어난 현민은 아직 4월 1일 속에서 자고 있는 하늘을 눈으로 확인하고 거실로 나와 주방 쪽으로 슬리퍼를 끌고 갔다. 어젯밤 하늘이 물에 헹궈 엎어둔 맥주캔을 농구공 삼아 분리수거용 비닐에 던져 넣었다.

캔이 돌면서 물기가 튄다. 아무리 엎어둬도 안의 물기가 완벽하게 배출되지 않는 원시적인 캔의 구조에 오늘도 심심한 분노가 잠깐 일다 사라졌다. 티슈로 물방울을 지우면서 현민은 주방 싱크대 뒤 작은 창문 밖으로 눈길을 던졌다.


출근길 정장 차림의 빨리 걷는 직장인들, 지각했는지 뛰어가는 학생들, 조깅하고 돌아오는 트레이닝복 차림의 동네 주민들, 심지어 종류를 알 수 없는 새 울음소리까지 모두 어제 아침과 똑같았다.

창틀 안쪽에 세워둔 작은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거실에는 혼자뿐이었지만 현민은 거울을 안 보는 척하며 코털의 안부를 힐끗 확인했다. ‘잘라야겠네.’ 가벼운 안도의 웃음이 콧바람과 함께 새어 나왔다.

하늘만큼은 아니지만 사실 현민도 어제는 마음이 살짝 동요했었다.


머그잔 바닥에 모래처럼 뿌려진 베트남산 인스턴트 커피 가루를 방금 끓인 물이 덮쳤다. 현민은 거실 구석 작은 컴퓨터 테이블 앞에 앉아 노트북의 전원을 켰다. 컵이 약간 기울어 진다. 뜨거운 흑해가 동요하며 더 컴컴한 목구멍 속으로 조금씩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키보드 소리는 점점 더 빨라져 갔다.


하늘이 거실로 나왔을 때는 거의 점심때였다. 갑자기 두 번의 삐- 하고 시끄러운 소리가 돌림노래처럼 겹쳐서 길게 울렸다. 소리의 발신지는 스마트폰이었다.


긴급재난문자 : 금일 오전 11:36분경 위성 관측상 제주도 소멸. 상세내용은 행정안전부 국민재난안전포털 홈페이지를 참조 바랍니다.


딩동, 딩동딩동, 딩디리딩동동동.

이번에는 현민의 노트북과 스마트폰의 알람 소리가 경박스럽게 빗발쳤다. 각종 글로벌 뉴스포털 앱이었다. 미국은 캔자스주만 통째로 사라져 나라 중앙에 그만큼의 호수가 생겼다. 영국은 북아일랜드가 사라졌다. 인도네시아는 발리섬과 수 많은 관광객이 동시에 사라졌다. 일본은 홋카이도가 사라졌다. 삿포로 라면도 함께 사라졌다. 거의 동시에 세계 지도에 수많은 구멍이 생겨버렸다. 자세히 검색할 새도 없이 다시 하늘의 스마트폰이 신경질적으로 두 번 삐- 소리를 냈다.


긴급재난문자 : 제주도 및 글로벌 주요 국가 일부 소멸 직후 외계 테러 집단(추정)으로부터 다섯 번째 메일 수신 확인. 상세내용은 행정안전부 국민재난안전포털 홈페이지를 참조 바람.


 “TV 좀 켜봐.”

하늘은 수많은 동시접속으로 인해(아마도) 하얗게 멈춰버린 스마트폰 화면을 주시하며 현민에게 말했다. 어제와 같은 아나운서가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제와는 다르게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일종의 본보기라는 이야긴가요?” 전문가에게 물었다.

“다섯 번째 메일에서 그들이 분명히 ‘사태의 심각성을 일깨우기 위해’라는 말을 사용한 점으로 보아 이런 극단적인 방법만이 인류의 공포심을 끌어내는 데 효과가 있다고 판단한 것 으로 보입니다.” 전문가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아니, 정황상 사실로 보이는 그들의 메일 내용들을 되짚어보면 그들은 외계인이며 99일 후 지구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방금 전 보도 드린 동시다발적 글로벌 영토의 일부 소멸 사태로 보아 그들은 인류의 차원을 뛰어넘는 기술을 보유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인류는 그들의 정확한 위치조차 모르는데 이미 그들은 인류의 언어를 학습했으며, 인류의 기술인 인터넷 메일을 다루고, 공간을 초월하여 수많은 영토를 동시에, 그것도 아무 전조증상도 없이 소멸시켰습니다. 폭발의 흔적이 전혀 없는 말 그대로 완벽한 소멸입니다. 대부분의 인류가 할 수 있는 생존 방법은 그들이 제시한 ‘신인류의 조건’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이제 99일 남았습니다.”


어처구니없게도 믿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그들이 보여준 본보기는 불가능에 가까운 내용이었지만 더없이 완벽하게 실행되었다. 이제 99일 후에 벌어질 일은 너무나도 명확해졌다. 그들을 설득해서 돌려보내거나 그들에게 맞서서 물리치거나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준비하지 않으면 그들의 표현대로 인류는 ‘삭제’될 것이 분명했다.


이미 심각했던 하늘과 이제 심각해지기 시작한 현민은 서로 얼굴을 맞대고 할 수 있는 현실적인 조치를 짜내기 시작했다. 먼저 하늘이 입을 열었다.

“일단 오늘 이 시점부터는 너는 코털 나는 겨털을 절대 밀어선 안 되는 거네.”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검색하던 현민이 말했다.

“여기 봐. 개인의 차이가 있지만 체모는 하루에 평균 0.2~0.4밀리미터 정도 성장한대. 잘 안 자랄 수도 있으니까 안전하게 0.2로 계산해서 곱하기 99 하면 얼마지?.”

잠깐의 정적 후 실망한 목소리로 현민이 다시 말을 이었다.

“19.8밀리면 2센티 정도밖에 안 되잖아! 하루 0.4밀리로 쳐도 4센티가 채 안 되는데 뭐야, 다 죽으라는 건가. 맞다! 코털 안 자른 지 좀 됐는데 몇 밀리나 되는지 재봐야겠다.”

현민이 주방 창가에 세워둔 작은 거울 앞에서 볼썽사납게 콧구멍을 쳐들고 긴 자를 이리저리 힘겹게 움직이는 동안 하늘은 슬그머니 화장실로 들어가서는 조심스럽게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아, 어제 정리했는데.’ 혹시나 하고 큼직한 세면대 거울에 조심스레 비춰본 새하얀 겨드랑이에는 역시나 털은커녕 거뭇한 기미조차 없었다. ‘남이 쉽게 볼 수 있는 곳도 아닌 데 왜 나는 무슨 바이러스라도 제거하듯 그리 열심히 뽑아댔을까?’ 자책으로 시작된 하늘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급기야는 여성에게 하얀 겨드랑이를 강요하는 사회를 비판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앗싸! 거의 1센티는 되겠다 이거.”
문틈으로 새어 들어온 현민의 기분 좋은 탄성에 하늘은 갑자기 쳐든 팔이 민망해졌다.


“하.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야. 이 외계 살인자 변태 새끼들 때문에.”
옷을 소매까지 내리면서 하늘은 한숨 섞인 하소연을 조용히 내뱉었다.

아무 잘못 없는 문을 쾅 닫고 나왔다. 이어서 현민에게 말을 쾅 하고 던졌다.


“야! 피자라도 좀 시켜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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