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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회중년생 Oct 22. 2022

1일 저녁

100일 - 두 번째


무언가를 하지 않고도 이렇게 시간이 빨리 지나갈 수 있나 싶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7시가 코 앞이었다. 하늘의 머릿속은 텅 비어있었다. 블록버스터급 뉴스의 내용을 슈퍼히어로가 아닌 일반인이 받아들이기엔 3시간은 너무 짧았다.


뉴스특보가 다시 시작되었다. 격투기 메인이벤트에 앞서 양 선수의 화려한 전적을 소개하듯 지난 한 세기 동안 일어난 국제 테러 사건 및 논란이 되었던 외계인 관련 자료들을 편집해서 보여주고 있었다. 인류가 멸망할 수도 있다는 무게감과는 별개로 특종을 전하는 방송인의 상기된 표정은 순수하게 신나 보였다. 시계는 7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상황실 앞에 나가 있는 김선관 기자를 연결해보겠습니다. 김선관 기자! 예고된 4번째 메일이 도착했습니까?”
“네, 메일은 조금 전인 저녁 7시 정각에 도착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메일 수신 직후 국제 정상들 간의 긴급화상회의가 시작되었으며, 이 회의가 끝나는대로 메일의 내용을 국민 여러분께 공개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마트 가서 통조림이나 생수, 라면 같은 것 좀 사 올까?”
“사재기? 아직 확실한 것도 없는데 오버 아냐?
현민은 하늘의 짜증 섞인 대답에 갑자기 낄낄대며 웃었다.


“너야말로 오버하지 마. 집에 먹을 게 없잖아. 식은 치킨까지 다 먹었는데 어떡하려고? 저거 다 헛소리야. 섬 몇 개 사라진 거야 뭐, 우연히 예측했겠지. 외계인이 말이 돼? 그리고 테러라면 어차피 우리나라는 큰 상관 없을 거야. 걱정은 마트 다녀와서 하자 응?”


하늘은 대꾸하지 않고 윈드브레이커 점퍼를 집어 들고는 주머니를 만져 지갑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저 안전불감증 새끼의 말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집에서 걱정만 하느니 잠시 바람 좀 쐬고 싶어서였다. 더구나 화상회의가 끝나려면 시간은 좀 걸릴 테니까.


뉴스가 우리 집에만 나오는 걸까? 밖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학원 앞에는 수업하러 가는 길인지 끝나서 나오는 길인지 알 수 없는 한 무리의 학생들이 모여서 깔깔거리는 중이었고, 동네에서 까칠하기로 유명한 할아버지는 오늘도 빵빵거리는 차들 사이로 당당하게 화를 내며 무단횡단을 하고 있었다.


마트도 마찬가지였다. 하늘의 예상과는 달리 진열대는 부족함 없이 꽉꽉 차 있었으며, 계산대 점원들은 아주 일정한 속도로 침착하게 제품의 바코드를 찍어내고 있었다. TV 안은 긴박한 세상, TV 밖은 평온한 세상으로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공기가 전혀 달랐다. 하늘 혼자만 있어야 할 세상의 문을 잘못 열고 나온 기분이었다.


하늘은 도어락이 열리자마자 현관 앞에 물건과 슬리퍼를 내던져놓고 들어와선 차갑게 마른 손가락으로 TV 리모컨부터 잡았다. 정상들 간의 긴급화상회의는 이미 끝난 모양인지 메일 내용에 관한 보도가 한창이었다. 그런데 아나운서를 비롯한 전문가들의 표정이 어딘가 어색했다. 심각한 얼굴 사이로 웃음을 애써 참는 모습이 깨문 입술에서 여과 없이 드러났다.


“분명 사태의 심각성은 인정하지만 왜 이런 요구를 했는지, 풉(웃음), 이해되지 않는데요. 정말 외계인의 소행인지, 테러단체의 음모인지, 아니면 전 세계를 우롱하는 누군가의 장난인지, 각국 정상들의 의견도 나뉘고 있다고 합니다.”

보도하는 메일의 내용을 다 확인하자 하늘은 힘이 빠졌고, 현민은 아예 소파에 나뒹굴며 웃어댔다.



인류가 지구를 비워줘야 하는 날, 사실상 멸망의 날은 지금으로부터 100일 후, 그러니까 우리시간으로 7월 10일이었다.

메일에 따르면, 그들은 다른 은하계의 외계인(지구인의 입장에서)으로 우주선을 타고 이곳으로 향하고 있으며, 정확히 100일 후 기존 인류가 사라진 지구에 착륙해 신세계를 건설한다고 했다. 그들이 말하는 ‘기존 인류가 사라진 지구’ 만들기에 협조하는 방법은 3가지였다.


첫째, (100일 동안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기존 인류는 지구를 떠난다.

둘째, (100일 동안 그들이 제시한 조건을 충족하여) 기존 인류는 신인류로 거듭난다.

셋째, (100일 후까지 앞의 두 가지 중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고) 남아있는 기존 인류는 삭제된다.


첫째 방법은 기술적으로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극소수의 재벌이 아닌 이상 불가능할 것이므로, 사실상 죽지 않으려면 둘째 방법밖에는 없었다. 여기까진 황당하지만 웃음을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그들이 제시한 둘째 방법의 내용이었다.

이름하야 ‘신인류로 거듭나는 법.’ 그들은 메일에 정확히 명시하고 있었다.


100일 후인 7월 10일 정오까지 지구를 떠나지 않은 모든 남자는 코털, 여자는 겨털의 길이가 10센티미터 이상이 되어야 한다. 체모 길이가 기준에 충족되지 않은 자는 신인류의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 것으로 판단하여 즉시 삭제시킬 것이다.


이 무슨 살인을 게임 정도로 생각하는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와 같은 생각인가?

그것도 열 명, 스무 명 정도가 아닌 70억 명 연쇄살인, 아니 동시 살인 예고다. 그리고 그것보다 그 내용이 정말 가관이다.

콧구멍 털, 겨드랑이 털을 기르는 것이 유일한 생존 방법이라니. 하늘은 자신에게 화가 났다. 웃어대는 현민이나 TV의 아나운서의 가벼운 태도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장난 같은 내용인데도 순간, 털을 어떻게 길러야 하나 걱정부터 드는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웠다.

화끈거리는 손가락으로 하늘은 TV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눌러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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