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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회중년생 Oct 22. 2022

3일 to 일주일

100일 - 네 번째


어젯밤도 맥주가 불러주는 자장가에 의지해서 잠이 들었던 두 마리의 들개 중 첫 번째로 일어난 건 현민이었다.


사실 거의 매일 아침을 현민이 먼저 시작한다.

정리도 잘 안 하고 계획도 별로 없으며 코털도 잘 깎지 않는 진짜 들개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는 루틴이 딱 하 나 있는데, 매일 아침 진한 커피 한잔과 함께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쓰는 습관이 바로 그것이다.

잘 써지든 한 줄도 써지지 않든 무조건 같은 시간에 앉아서 일반적으로 하늘이 일어나는 점심시간 까지는 계속 쓴다. 그 덕분인지 어느덧 구독자 수가 제법 되는 인터넷 소설가로 활동 중이다.

따로 일자리를 구하지 않아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굶지 않을 정도는 된다는 소리다.


생활은 야생, 일은 문명 쪽이 현민이라면 하늘은 그 반대다. 생활면에서 하늘은 정리 정돈을 잘하며 조심성이 아주 많고 계획적이다. 하지만 일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한마디로 오늘만 산다.

돈이 다 떨어져야만 일을 하고 기준도 없다. 전공을 살려 번역이나 학원강사를 하다가도 편의점이나 백화점 행사 알바를 나가기도 하고 갑자기 땅콩을 떼어다가 팔거나 붕어빵 장사를 인수해서 한동안 전념하기도 한다. 일전에는 출시 전의 약을 먹고 일정 횟수 채혈을 하는 대가로 보수를 받는 생동성시험(속칭 마루타 알바)을 하기도 했다.

일에 귀천은 없다 쳐도 하는 일들의 일관성이나 꾸준함이라곤 눈을 뜨고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다.

배고플 때 닥치는 대로 뒤지는 들개처럼 필요할 때 닥치는 대로 일한다.


이 정 반대 성향의 들개 두 마리가 유일하게 일치하는 지점은 바로 먹을 때다.

배가 고파 눈이 뒤집힐 정도가 되어야 제가 배고픈 줄을 안다. 그러고는 미친 듯이 먹이를 목구멍 저편으로 밀어 넣는다. 이것만큼은 둘이 똑같다. 그 순간만큼은 순도 100퍼센트의 들개 두 마리가 된다.


하지만 여느 때처럼 하늘이 거실로 기어 나온 점심시간. 현민은 노트북 앞에 없었다. 묘한 표정을 하고선 TV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도 홈쇼핑 채널을.


쇼호스트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하늘의 귀에 먼저 와 닿았다.
“굵고 긴 모발을 원하십니까? 원하는 부위의 모발에 바르기만 하시면 3개월 안에 10센티는 기본! 바를수록 날마다 쑥쑥! 잡아당겨도 끄떡없이 튼튼!”


“왜, 이런 걸 봐? 탈모 왔어?” 하지만 이제 막 안경을 집어 든 하늘이 목격한 화면 속에서 찰랑거리는 건 머리카락이 아니었다. 남은 잠이 확 깼다. 여성 모델들은 민소매 티셔츠를 입고서 팔을 번쩍번쩍 치켜들었고 남성 모델들은 번들거리는 콧구멍을 벌름거리면서 그보다 더 번들거리는 크림을 연신 발라댔다.

현민은 신기함을 넘어 감탄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와, 자본주의! 적응력 진짜 빠르다. 이제 하루 지났는데.”


채널을 돌렸다.

“역시, 검은콩이죠! 어제 방송 보셨죠? 뉴스 다들 보셨잖아요~ 발모에 좋은 검은콩! 조금 지나면 가격도 엄청나게 오를 텐데 센스있는 주부님들~ 기본 12봉에 3봉을 더 드립니다. 남편도 아이도 주부님도 모두 챙기셔야죠~ 3개월 뒤에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대비하셔야죠~ 방송 중에 주문하시면 추가로 1봉 더! 모발처럼 통 굵~은 혜택! 방송이 끝나면 혜택도 사라지니까 지금 바로 들어오세요!”

하루 이틀 만에 어디서 섭외했는지 이전 채널과 마찬가지로 무성한 모델들이 자신감 있게 웃고 있었다. 하늘은 출연을 위해 어젯밤 급하게 심었을(?) 모델들의 모습을 잠시 상상했다.

홈쇼핑 채널은 수십 개였지만 어디로 돌려봐도 주제는 한가지였다. 둘은 배고픔도 잊은 채 해가 다 질 때까지 홈쇼핑 채널을 관람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사지 못했다. 검증 안 된 제품의 효과 때문에 망설인 것도 있었지만 벌어진 현실을 아직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더 큰 이유였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앞으로의 진로를 선택해야 했다.

충분히 받아들이고 고민하기엔 석 달이란 시간도 우리의 털 길이도 너무 짧았다. 하늘과 현민은 배고픔을 핑계 삼아 스스로 들개가 되어 맥주와 남은 음식으로 허기를 채우고는 잠이라는 수단으로 막막한 현실에서 도피했다.




일주일이 허무하게 흘렀다.

처음에는 비웃던 사람들도 하루하루 지날수록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가장 반응이 빨랐던 홈쇼핑뿐만 아니라 다양한 채널을 통해 역사상 유례없던 그야말로 ‘털 난리’가 펼쳐졌다.

WTN의 간판 프로그램인 밤샘 토론의 이번 주 주제는 ‘모발이식, 과연 외계인의 기준에 부합하나?’였다. 너무 진지해서 웃음이 날 정도로 패널들이 열띤 토론을 했다. 그리곤 모든 토론의 후반부가 그렇듯 흥분된 어조와 말 자르기로 점점 과열되어갔다.


“아, 글쎄. 당연히 된다니까요? 외계인들의 이메일. 그 어디를 살펴봐도 길이의 조건만 언급했지, 이식하면 안 된다는 말이 없잖습니까~ 기르는 방법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데 안 되고 말고가 어디 있어요? 붙이든 기르든 심든 10센티만 되면 되는 거지. 거 참 답답하시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야말로 다시 한번 말씀드리는데요. 전 세계 영토들을 간단히 사라지게 만든 상대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되죠. 이식만으로 해결될 거면 그런 제안을 했을 리가 없어요.”


“아니, 근데 왜 제 말을 끊으시는 겁니까?”


“자꾸 억지를 부리시니까 그렇죠. 국민들의 생사가 걸린 일인데 믿고 이식했다가 아니면! 어, 책임지실 거냐고요!”


치고받던 토론 아닌 토론은 하늘이 채널을 돌리기 직전에는 급기야 ‘동물털이나 인조털을 이식해도 인정해줄까’라는 지경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또 다른 뉴스채널에서는 사라진 영토에 살던 사람들의 실종에 관해 다뤘다.

사망을 한 것인지 혹시 어딘가에 생존해 있을 가능성은 있는지 나름의 분석을 통한 추론을 소개하고 있었으나 어느 쪽도 확실한 것은 없었다. 시체나 땅의 파편 같은 것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착안한 공간이동설까지 나왔지만 이제 비웃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이 보여준 수준의 기술이라면 ‘순간이동’도 불가능할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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