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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회중년생 Oct 22. 2022

당일 to 100일

100일 - 마지막



7월 10일 새벽.


멸망 날의 해는 평소와 비슷한 크기로 비슷한 시각에 떠올랐다.

현민은 해가 일찍 뜨는 여름이라 그나마 겨울보다 아침이 길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습관적으로 집어 든 주방 창가의 작은 거울은 잠시 뒤의 결과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좁고 검은 터널 두 개를 비추고 있었다.

사람 털, 동물털, 인조털 등이 불길하게 삐져나온 현민의 콧구멍은 잦은 시술로 부어올라 있었다.


멈추지 않는 불안감에 한동안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애초에 계획했던 수단은 다 실행에 옮겼다. 이제 외계인의 판결을 기다릴 뿐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침실로 다가가 문을 열자 여름 더위에 이불을 다 차버리고는 더없이 편안한 표정으로 잠든 하늘이 보였다. 갖은 고문을 견뎌내고 광복을 맞은 만세 운동가처럼 자유롭게 두 팔을 머리 위로 쭉 뻗은 채였다. 활짝 열린 민소매 티셔츠 옆으로는 노력의 결과물들이 더없이 하늘대고 있었다.


10센티에 도달한 건 불과 며칠 전이었다. 잠도 못 자며 할 수 있는 노력은 다하더니 마침내 극적으로 키워낸 하늘이었다. 그러고는 걱정하는 현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상관없는지 며칠째 잠만 잔다. 세상 근심 없는 아이 같은 표정으로. 누구보다 행복하게.


사실, 스스로 기른 코털이 아니라는 것보다 현민에게 있어서 더 큰 불안 요소는 마지막 비상 대비책이었다. 가짜뉴스라며 비웃던 처음과는 달리 대안이 없어서 조급한 마음에 선택하기는 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혼인신고’로 두 사람 다 생존하겠다는 전략은 너무 허술했다. 운이 좋아 외계인이 지구인의 제도를 이해했다고 해도 친절하게 “지구에선 지구의 법을 따라야 하니 OK!”라며 적용해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늦었어.’ 

현민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냉장고를 열고 어제 사둔 맥주와 소고기를 꺼냈다. 맥주는 구하기 힘들다는 한정판. 이름도 거창하게 ‘디데이’였다. 소고기는 한우 투 플러스. 그것도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가장 비싼 등심이었다. 만약 쓰리 플러스나 포 플러스 등급이 있었다면 아무리 고가여도 그걸 샀었을 거다. ‘마지막’이라는 최고의 이유가 있으니까. 거실 한복판 테이블에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올리고 그 위에 팬을 올리고 다시 그 사이에 불을 올렸다.


끽- 끼이익.
침실 문이 열렸다. 곧이어 하늘이 홀린 듯 거실로 나왔다.


칙- 치이익.
생기가 도는 하늘과는 반대로 고기는 불을 만나 서서히 핏기가 사라져갔다. 정오까지 두 시간 남았다.


징- 지이잉.
고기를 굽던 현민의 손목에서 갑자기 진동이 울렸다.


긴급재난문자 : 금일 오전 10:00시 경 위성 관측상 제주도 출현. 상세내용은 행정안전부 국민재난안전포털 홈페이지를 참조 바랍니다.


조금 전까지 NASA의 우주선 프로젝트 발사 카운트다운과 종말론자들의 과격한 약탈행위를 보도하던 채널들이 일제히 사라졌던 제주도의 귀환을 알렸다.

갑자기 사라졌던 석 달 전처럼 정말 느닷없이 출현했다. 사람들도 한라산도 돌하르방도 사라진 적 없었던 것처럼 말짱히 제자리에 있었다. 해외도 난리였다. 캔자스주도 북아일랜드도 발리섬도 홋카이도도 돌아왔다. 삿포로 라면도 돌아왔다. 세계 곳곳에서 사라졌던 모든 것들이 귀환한 것이다.


신기하게도 귀환자들은 사라졌던 석 달 동안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정확히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잠깐 꿈꾸고 일어난 것 같은데 언론에서 취재진이 들이닥쳐 당황스럽다고 했다. 실제로 입고 있던 옷도 석달전 그대로였고 수염도 머리카락도 전혀 자라지 않은 채였다.

외계인에게 ‘삭제’당했던 시간은 지구와는 다르게 흘렀을지 모른다고 TV 속 전문가는 말했다. 무사히 돌아온 자들을 축하하는 것도 잠시, 계속되는 인터뷰 속에는 새로운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것은 잠깐 꾸었다는 꿈의 내용인데 불길하게도 귀환한 모두가 똑같았다.


외계인이 등장해서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했다.


항로 변경으로 일정 지연.
지금부터 다시 100일 후 정오, 지구 도착. 생존 조건은 이전과 동일.


내용은 여전히 일방적이었고 이외에 다른 설명은 아무것도 없었다. 100일이라는 추가시간이 주어졌다는 말에 아직 코털이 아담해 보이는 남자 전문가의 얼굴은 순간 안도감과 기대감으로 상기되었지만, 귀환자들이 꿈에서 봤다는 외계인의 생김새를 듣고는 전보다 더 차갑게 식어버렸다.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신체 구조가 매우 달라 손도 발도 얼굴도 몸통도 인류와는 전혀 다른 위치에 기괴하게 붙어있었다. 외계인들의 겨드랑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눈썹 위치에 있었고 그들의 콧구멍은 우리의 귓구멍 위치에 있었다고 했다.

쉽게 말해서, 100일 후까지 인류가 길러야 할 것은 겨털과 코털이 아닌 눈썹과 귀털일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물음표들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귀환자들의 말을 믿어야 할까?

이대로 내일 멸망하지 않을까?

도대체 어디를 길러야 할까?

우리는 지금 뭐 하는 짓일까?



휘둘리는 데 지쳤다. 다리는 풀렸다. 울고 싶었다.
지이잉- 손목이 울었다.
눈앞으로 들어 올린 스마트 워치에는 오늘의 스케줄이 기록되어 있었다.


사랑해. 200일.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지이잉- 연이어 손목이 울었다.


잊지 마. 대출 연장.
해결해야 할 과제는 외계가 아닌 지구에도 있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하늘과 현민의 네 다리는 어느새 일어나 걷고 있었다. 둘은 손을 굳게 잡고 은행 문을 힘차게 밀고 들어갔다.


남겨진 빈 회전문이 방황하며 현실 속을 하염없이 돌고 있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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