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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회중년생 Oct 22. 2022

친구

10만 원 - 네 번째



갑자기 지하철 안이 밝아졌다.

한강을 지나고 있었다.


열차 맨 뒤인 10-4번 출입문 옆, 기장실 벽면 쪽에 기댄 채 서 있었던 나는 눈을 들어 창문 너머로 빠르게 스쳐 가는 메마른 가로등과 다리를 바라보았다. 10년 전과 다름없는 늦겨울 금요일 오후 풍경이라고 생각했다.


“금요일인데 학교에서 약속 있어?”

강석이는 지하철에서도 항상 맨 뒤 칸 끝에 서 있는 나를 쉽게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이제 졸업이잖아. 마지막까지 학교에서 마셔야지~ 넌? 지금 학교엔 왜 가는데?”

“도서관에 반납할 게 있어서. 있다 합류해도 되지? 전화할게.”
“오~ 니가 웬일이냐. 콜이지. 볼일 보고 연락줘.”


뜬금없는 기억이 떠올랐다.

두고두고 남겨두고픈 ‘추억’일 리 없는, 그저 10년 전 어느 날의 단순한 기록이 버튼을 잘못 눌러 저절로 재생된 기분이었다.

지금 향하고 있는 대한대학병원은 나와 강석이가 졸업한 대한대학교 캠퍼스 안에 있는 병원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나는 지금 강석이를 만나러 모교로 향하는 길이나 마찬가지였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약속 장소가 정문에서 인문대학이 있는 왼쪽 길이 아닌, 병원과 장례식장이 있는 오른쪽 길로 가야 한다는 점이었다. 코끝이 찡했다. 때마침 아직 겨울이라 이른 시간인데도 서서히 기울 고 있는 붉은 석양까지 더해져 마음이 다시 말랑말랑해지고 있었다. 아까 회사에서 출발할 때 대학 동기 정섭이랑 주고받은 메시지도 생각났다.


-뭐? 나한테는 그런 소식 안 왔는데?


강석이의 부고 메시지를 받았다는 나의 말에 정섭이는 분명 그렇게 답했다.

연락을 못 받았다는 소리는 곧, 강석이 스마트폰 연락처 ‘친구’ 폴더에 저장되어 있지 않다는 소리였다. 정섭이도 강석이와 연락 안 한 지 몇 년 됐다곤 했지만 나는 소식 끊긴 지 무려 10년이었다.


암이 있었는지도 완치가 됐었는지도 전혀 모르고 지냈는데, 정섭이도 살아남지 못했던 자신의 ‘친구’라는 폴더에 강석이는 나를 남겨두었던 것이다. 어떤 이유였는지는 모르지만, 그 꼼꼼한 성격에 절대로 단지 지우기 귀찮아서 남겨두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정섭이 연락처만 따로 삭제되었을 리가 없었을 테니까. 그 타이밍에 갑자기 알 수 없는 우월감이 척추부터 목뒤를 타고 올라와 귀 끝으로 짜릿하게 빠져나갔다.


동시에 내 오른손은 숙련된 조교처럼 재킷 왼쪽 안주머니의 단추를 풀고 미끄러지듯 침투하고 있었다. 엄지와 검지, 중지 특공대는 봉투 밖에 알몸으로 서 있는 오만 원권 1장을 집어 망설임 없이 다시 봉투 안으로 집어넣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부의금의 액수를 저울질하는 건 나를 진.짜.친.구.로 생각해주었을지 모를 친.구.에 대한 모독이었다.


나는 다시 오만 원권 2장을 품게 된 봉투를 남겨두고 안주머니의 단추를 단단히 채웠다.


지하철은 어느새 놀이동산과 백화점이 있는 환승역에 정차 중이었다. 활짝 열린 출입문 너머로 대한대학교 심볼이 크게 새겨진 똑같은 패딩점퍼를 입은 한 무리의 학생들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동기들끼리 우르르 몰려다니던 대학 신입생 때, 공강이 있거나 오후 수업이 없는 날이면 학교와 가까우면서 놀기 편한 이곳으로 자주 나왔었다. 그리고 언제나 마무리는 노래방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창피해서 죽고 싶지만, 그땐 무슨 자신감이 그리 넘쳤는지 나는 박치면서 랩을 했고, 정섭이는 몸치면서 춤까지 췄다. 노래하러 갔다기보다는 주체 못 하는 에너지를 발산하러 갔다고 하는 게 맞는 소리였다.


“너도 한 곡 불러~ 못해도 괜찮아.”
“그럼, 발라드 해도 돼? 댄스곡은 잘 몰라서.”


강석이가 노래를 부른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부끄럼이 많은 편이라 평소엔 신나게 노는 친구들 장단에 맞춰 탬버린을 흔들거나 가끔 흥이 오르면 마이크 없이 후렴구를 따라부르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하지만 이게 웬걸. 쑥스럽게 시작한 친구는 노래를 엄청나게 잘했다. 풍성한 저음에 쭉쭉 뻗는 고음까지 가수 같았다.

평소 같았으면 아는 가사가 나오기가 무섭게 서로 마이크를 차지하려고 다투는 우리였지만 누구 하나 끼어들지도 않고, 1절 끝나자마자 취소 버튼을 누르지도 않고, 심지어 간주점프도 않은 채, 강석이의 단독 무대를 2절의 마지막까지 감상했다.


노래방 기기 점수마저 100점.

우러나온 손뼉까지 치고 말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노래 부르기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빠른 곡 위주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본인들만 신났던 우리의 흥을 깨고 싶지 않아서였던 것 같았다. 그런 강석이에게 못 불러도 괜찮다고 했으니 그때의 내 모습이 새삼 민망해져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추억에 완벽히 동기화된 나를 태운 지하철은 강석이에게 가기 위해 다시 검은 터널 속으로 겁 없이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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