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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회중년생 Oct 22. 2022

정섭

10만 원 - 세 번째



지하철역으로 향하면서 대학 동기 정섭이한테 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꾸준히 연락하는 동기라곤 이 녀석 하나뿐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마저도 언제나 정섭이가 먼저 연락해오긴 하지만.


-어? 니가 먼저 웬일이냐?

-뭐? 나한테는 그런 소식 안 왔는데?
-나도 연락 안 한 지 몇 년 됐어.
-암이었는데 초기라 수술해서 완치됐다고 기뻐했던 게 마지막이었을걸 아마.

-그때도 다른 애들하고 막 연락하고 그러는 거 같진 않더라.
-아, 아버지 생신? 오늘 밤에 바로 내려간다고?
-난 오늘은 안되고 내일 잠깐 들르든지 해야겠다.
-참! 받았다는 문자 나한테도 보내줘.
-어, 연락 고맙다. 어쨌든.


더 이상 어리진 않지만 그렇다고 생을 마감하기엔 사고나 불치병이 아니라면 너무 이른 나이였다.

몸이 개찰구를 통과하고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머리로는 아마도 암이 재발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사고였다면 자기 죽음을 미리 알고 ‘이런 소식이라 미안하다.’든지, ‘먼저 가서 지켜보고 싶다.’든지 같은 글을 남길 수는 없었을 테니까. 남의 일 같지 않아 슬퍼졌다. 떠나기 위한 열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플랫폼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오른손을 왼편 재킷 속으로 가져가 봉투의 존재를 확인하고는 안주머니에 있는 단추까지 채웠다.


목적지는 대한대학병원 장례식장.
회사에서 지하철역으로 10정거장이니까 20분 정도에, 걸어서 이동하는 시간까지 모두 합쳐도 30분이면 충분했다. 왕복이면 1시간이니까 들렀다가 다시 회사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저녁 약속에 가도 늦지 않는다.

약속 시간 전에 어떻게든 친구의 죽음을 끼워 넣는 듯한 기분이 들어 잠깐 민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 달 전부터 정해져 있던 그 약속은 어쩌면 내 인생을 바꿀지도 모를 중요한 기회였기 때문이다.


처음 입사했던 회사에서 나를 아꼈던 선배가 특별히 마련해 준, 외국계 메이저 그룹 이직을 위한 사실상 면접이나 마찬가지인 자리였으니까.

그 선배는 내가 신입이라 모든 것이 서투를 때부터 롤모델 같은 존재였다. 클라이언트와 첫 미팅이 잡혔을 때도, 첫 프리젠테이션을 할 때도, 심지어 내가 첫 이직을 할 때도 아낌없는 조언을 해주었던 선배. 사회에서는 나의 형이자 친구, 때로는 아버지 같은 은인이었다.

그 때문에 이번 기회는 놓칠 수 없었다. 외국계 메이저 그룹이라는 점도 있었지만, 그 선배와 다시 한번 함께 일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동안 성장한 내 모습을 보여주고도 싶었고, 항상 신세만 져왔던 선배에게 이제는 내가 업무적으로 도움을 주고 싶기도 했다.

한 달 전에 선배의 연락을 받고 나서부터 오늘만 기다린 나로서는 아무리 친구의 갑작스러운 소식이 애석하더라도 미룰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가족 같은 선배와는 다르게 강석이는 이제는 완전 남에 가까운 친구였다. 부모님은 한 번도 뵌 적 없고, 동생 이름조차 이번에 처음 알았을 정도로 강석이 본.인. 외. 에.는. 나.와. 아.무. 연.관.이.나. 친.분.이 없.으.니. 어차피 장례식장에 가도 어색할 게 뻔했다.

붐비기 전에 들러서 조용히 부의금만 전하고 나올 생각이었다. 그 순간, 왼쪽 안주머니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10만 원이 다소 과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리고 그 생각은 금세 스스로 부스터를 찾아 달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내가 결혼하거나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심지어 내가 죽는다 해도 강석이 가족이 우리 집 경조사에 올 확률은 없었다.

더구나 강석이 동생은 형 스마트폰에 저장된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전송했을 뿐 ‘나’라는 존재는커녕, 누가 왔는지도 전혀 알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까지 미쳤다. 결국 맴돌던 수많은 속마음 중의 하나가, 당첨된 뽑기 캡슐처럼 툭- 입 밖으로 튀어 나오고 말았다.


“예의상 보낸 건데 가주는 게 어디야.”


내 오른손은 어느새 슬그머니 재킷 안주머니의 단추를 풀고, 깊숙이 손을 넣고 더듬어서 봉투 입구를 찾고 있었다. 아직 퇴근 시간 전의 지하철이라 사람들이 붐비지는 않았지만 보는 눈의 숫자는 충분했기에 노골적으로 봉투를 밖으로 꺼내서 돈을 셀 순 없었다.

찾아 낸 봉투 입구에 손을 넣으면서 풀이나 테이프로 붙여두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자 얼굴이 순간 화끈거렸다. 반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다 맞은편에 기대어 서 있던 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내 안주머니 속에 내 손을 넣고 있는 상황인데도 마치 도둑질하다가 들킨 기분이었다. 마스크를 썼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붉어진 얼굴이 그대로 보일 뻔했다.


다행히도 그 학생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지 다시 본인의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휴- 한 차례 위기를 넘기자 그 이후엔 순탄했다. 내 오른손 엄지와 검지, 그리고 중지가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 덕에 감촉만으로 오만 원권 2장을 찾아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회사에서 챙겨온 부의금 봉투는 표지를 제외하면 그 바로 안쪽으로 붙은 속지는 얇아서 지폐와는 질감이 미묘하게 달랐으니까. 


벌려진 봉투를 중지로 지지해놓고, 엄지와 검지로 오만 원권 1장을 집어 봉투 밖으로 꺼냈다. 이제 내 왼쪽 재킷 안주머니 속엔 오만 원권 1장이 든 부의금 봉투와 그 옆엔 오만 원권 1장이 나란히 서 있을 것이었다. 있다가 장례식장에 도착하면 자연스럽게 오만 원권 1장이 든 봉투만 집어 꺼내서 함에 넣고 오면 된다. 그럼 안주머니에는 오만 원권 1장이 남겠지. 친구의 죽음은 애석하지만, 동생이 메시지를 보내주지 않았다면 김강석이란 이름은 내 삶과는 전혀 상관없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임무를 완수한 엄지와 검지와 중지는 협동하여 마지막으로 안주머니의 단추를 잠갔다. 나는 자신에게 다짐하듯 다시 한번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 가주는 게 어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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