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두브로브니크 스르지산 탐험대

아이와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 3

by Silvermouse

드디어 두브로브니크의 첫 아침이 밝았다. 커튼을 열고 발코니에 나가니 크로아티아 여행책에서 보아오던 바로 그 장면이 펼쳐졌다. 아드리안 해와 주황색 지붕의 집들, 드디어 우리가 시카고에서 출발해 길고 긴 비행을 해서 도착한 이 곳, 두브로브니크다. 아침 하늘엔 두텁고 묵직한 이불 같은 구름이 덮여있었다. 한겨울에 오면서 그림 같은 푸른 바다를 기대하진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실망할 이유도 없었다. 대신 12월 끝자락 답지 않은 선선하고 부드러운 지중해 겨울 날씨가 고마울 뿐이었다.


잔뜩 무거운 하늘, 그래도 살랑이던 지중해 겨울 바람



호텔 앞 관광 안내소에서 두브로브니크 패스 1일짜리를 샀다. 이걸 가지고 있으면 24시간 동안 10개 정도의 성벽, 박물관, 미술관 등을 모두 들어갈 수 있고, 아직 버스를 타는 방법은 모르지만 하루 종일 버스도 무료로 탈 수 있단다. 사실 미리 계획을 짜 놓고 오지 않은 우린 그 패스를 사면 덤으로 주는 관광지 리스트가 탐이나 패스를 구입했는데, 이 곳에 나온 곳들만 주욱 둘러봐도 두브로브니크의 3박 4일이 꽉 채워질 것 같았다.


모든 여행의 시작점에 관광 안내소가 있다


이제 패스도 샀으니 마음이 든든해졌다. 어디부터 갈까 하다가 우린 먼저 두브로브니크에 오면 반드시 가야 한다는 스르지산을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기로 했다. 워낙 작은 도시라 호텔이 있는 올드 타운의 골목 사이로 조금만 올라가다 보면 케이블카 타는 곳이 나왔는데 겨울이라 사람이 없어 티켓 판매원이 상주하고 있지 않아 영업을 안 하는 줄 알았다. 잠시 기다려보니 우리 말고 다른 관광객들 한 두 명이 모이기 시작했고, 산 위에서 케이블카 한 대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일당백 역할을 하는 직원은 빈 케이블카에 혼자 내려 티켓 판매하는 곳으로 가서 티켓을 팔더니 다시 새로운 손님들을 케이블카에 태웠다.


저 터널을 통과하면 스르지산에 오르는 케이블카가 나온다
겨울이라 사람이 없어 운영 안하는 줄 알았던 케이블카
스르지산은 높지 않다. 저 위에 보이는 곳이 정상.


케이블카 안은 깨끗했고 사람이 얼마 타지 않은 덕분에 여유 있게 각자 원하는 자리에 설 수 있었다. 아이와 나는 두브로브니크와 아드리안 해가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맨 뒷부분에 탑승했다. 케이블카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마을에서부터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아이는 그 모습이 놀라운지 '와!' 감탄을 연발하며 이 아름다운 도시를 감상했다. 한 3분쯤 올라갔을까, 케이블카는 점점 속도가 느려지더니 탈칵 소리와 함께 스르지 산 정상에 도착했다. 케이블카를 더 타고 싶었지만 산 정상이 높지 않아(412m) 금방 끝났다. 그래도 마냥 아쉽지만은 않고 다행이라고 느꼈던 건, 우리가 왕복 티켓이 아닌 올라가는 편도 티켓만 끊었기 때문이다. 우린 겁도 없이 이 스르지산을 걸어 내려가 보기로 했다.


정상에 올라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붉은 지붕의 구시가지와 그림 같이 넓게 펼쳐진 조용한 아드리안 해, 그리고 여전히 하늘을 묵직하게 덮고 있는 구름이 너무나도 평온하고 아름다웠다. 사진을 찍으며 우린 산 정상에서 천천히 걸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아이는 아까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오다가 본 산 중턱에 살던 야생 염소들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진짜로 그 염소들을 만날 수 있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찾아 나서보자고 했다. 스르지산을 오를 때는 구시가지와 바다가 보이는 산 앞 쪽을 볼 수 있지만, 내려갈 때는 그 반대편으로 가게 된다.


스르지산 정상에 오르면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아빠의 던지기 놀이. 엄마는 위험하다고 하지 말라고 말려도 속수무책.
남해의 다도해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스르지산의 뒤편은 우리가 올라간 앞 쪽과는 완전히 다른 풍광이다. 저 멀리 돌산이 보이는데 아마도 저 쪽 끝까지 가면 국경을 넘어 보스니아가 나올 것 같다.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다 보니 거짓말처럼 야생 동물들이 나타났다. 기대했던 염소보다 더 아이가 반가워했던 야생 당나귀. 당나귀들은 점심시간인지 돌산 중턱에 옹기종기 모여서 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예전에 그리스 산토리니에 가서도 이런 산에 사는 당나귀들을 만나봤던 아이가 신이 나서 더 가까이 가보자고 했다. 아빠 목마를 타고 조심조심 당나귀들 곁으로 간 아이는 상대가 사납지 않은 걸 확인했는지 땅에 내려와 당나귀들을 보며 까르르 좋아하며 떠날 생각을 안 했다. 아직 산 정상에서 출발한 지 10분도 안되었는데 한참을 이 곳에서 놀다 보니 문득 하늘에 먹구름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사람 하나 없는 이 길을 내려가다 비라도 내리면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는데 어쩌지? 아이에게 당나귀 밥 먹을 수 있도록 시간을 주자고 하고 우린 계속해서 산을 내려왔다.


산에 사는 당나귀. 산토리니에서 본 이후로 두 번째라 좀 익숙하다.


당나귀는 산에서 살아서 그런지 뾰족한 가시 덩굴도 있는 돌산을 빠르고 안정감있게 잘도 걷는다.
아이와 달리 난 겁이 많다. 그 덕분에 가끔은 나보다 아이가 더 많은 세상을 경험한다.


한참을 더 내려가니 이번에는 CNN에서 봤을 법한 전혀 예상 못했던 또 다른 장면이 나타났다. 바로 이 아름다운 도시는 불과 30여 년 전 참혹한 유고 내전을 치른 곳이었던 것. 산 중턱 곳곳에는 파괴된 건물 같은 그때 전쟁의 상흔들이 남아 있었다. 저 멀리 중세의 전쟁을 치러냈던 두브로브니크 올드 타운의 요새도 그렇고, 가장 최근의 유고 전쟁을 치른 이 척박한 돌산 스르지 산도 그렇고, 이 아름다운 도시에 왜 이렇게 많은 상처들이 남아 있는지 참 안돼 보였다. 그리고 이제는 이 작고 힘없는 도시가 스스로의 아름다움으로 더 강해져서 감히 누구든 쉽게 이 곳을 파괴하려는 생각을 더는 못하게 되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케이블카를 타고 쉽게 내려갔다면 두브로브니크를 아름다운 중세 도시로만 기억했겠지. 겁 없이 걸어내려 가기로 해서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무너진 요새들, 파괴된 건물들
케이블카를 타고 슈웅 내려갔으면 이런 멋진 산길을 걷지 못했겠지
산 중턱 곳곳에는 동물들을 키우는 집들이 있다.
평탄한 산길을 한참 내려가다보면 마지막으로 어려운 코스 돌계단이 나타난다.
엄마손, 아빠손을 번갈아 잡고 씩씩하게 내려오는 윤서.


걷다 쉬다를 반복하며 두 시간 정도 걸어 내려왔을까(구글맵 네비 상으로는 40분 거리) 드디어 올드 타운 입구로 내려왔다. 내려오는 동안은 힘든 줄 몰랐는데 마지막 계단을 내려오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다시 산 위 정상을 올려다보았다. 까마득하게 높아 보였다. 아마도 처음부터 이걸 알았더라면 감히 아이와 함께 내려올 생각은 쉽게 못했을 것 같다. 그래도 몰랐으니 우리 다 같이 해낼 수 있었다. 한 번도 칭얼대지 않고 내려온 아이도 오늘따라 기특해 보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스르지 산 정상을 다시 쳐다본다. '우리가 저 산 위에 있었지.' 아직 우린 두브로브니크를 떠나지 않았지만, 산 위에 두고 온 우리들의 시간이 벌써부터 그리워진다.


산을 내려오다보면 두브로브니크 마을 사람들이 사는 정겨운 마을이 나온다.


드디어 마지막 계단을 내려왔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만큼 마음은 뿌듯하다.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여행 이야기


1. 가장 마법같은 크리스마스를 찾아서

2. 중세 도시의 크리스마스 속으로

3. 우리는 두브로브니크 스르지산 탐험대

4. '왕좌의 게임' 그 성 안에 사는 사람들

5. 쇼퍼홀릭을 위한 두브로브니크 안내서

6. 올리브향 가득한 두브로브니크의 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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