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의 성벽 투어
아침에 눈을 떠보니 구름이 도시 전체를 감싸 안고 있었던 어제와는 다르게 맑게 개어 있었다. 바람도 마치 초 봄처럼 따스했다. 외투가 필요 없을 것 같은 하루였다. 우린 아껴둔 두브로브니크 성벽 투어를 해보기로 했다. 아드리안 해와 구 시가지를 한 번에 볼 수 있는 이 성벽 투어에는 아름다운 날씨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투어라고 해서 따로 가이드가 있어서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서 각자 성벽 한 바퀴를 둘러보며 걷는 것이다. 여름이라면 아마도 수많은 관광객들이 이 성벽에 담긴 역사적 이야기들을 듣기 위해 전문 가이드와 동행을 했겠지만, 지금은 한겨울이라서 그런지 가이드는 커녕 관광객도 드문 드문 보였다.
이번에 한국에서 두 달 유치원을 다닌 후로 말이 부쩍 늘은 아이는 이제 엄마, 아빠의 대화도 놓치지 않고 다 알아 듣는다. 필요한 정보가 있으면 머릿속에 입력하기도 하고, 마음에 안 드는 계획이 있으면 수정안을 내놓기도 한다. 오늘 아침에 '날씨가 좋아서 성벽 투어를 가야겠다', 고 하는 아빠의 얘기를 들은 아이는, 성에 들어가야 되기 때문에 드레스를 입어야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우리의 이번 여행 다음 행선지인 비엔나에서 크리스마스이브에 입으려고 챙겨 온 핑크색 드레스를 기어코 꺼내 입었다. 자기 옷 마음대로 입는 거야 내가 상관할 바 아니지만, 괜히 드레스 입고 화려한 공주님 성 기대하고 갔다가, 드문 드문 부서진 중세 시대의 요새를 보고 크게 실망하거나 올라가자마자 집에 가자고 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두브로브니크 성벽은 구 시가지의 총 3군데의 출입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 어디로 가든 다 이어지지만, 우리는 호텔에서 가장 가까운 파일 게이트에 있는 입구를 통해 들어갔다(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성벽 전체를 다 돌 계획이 아니라면 이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입구로 올라가면 약 3층 계단 높이의 성벽 위로 올라가야 되는데 그곳에 올라가면 이제 구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바깥으로는 아드리안 해가 펼쳐진다. 10세기에 처음 만들어져서 19세기까지 이 도시를 지켜주던 성벽은 도시 전체를 둥그렇게 둘러싸는 모양으로 지어져 있다. 이 성벽을 한 바퀴 둘러보면 약 2킬로 정도의 길이가 나온다고 했다.
성벽에 올라오자마자 아이는 본인이 생각하던 그 디즈니 성이 아님을 바로 파악했는지 더 이상 공주님을 찾지는 않았다. 여름이면 이 곳이 무척 덥다고 하는데, 오늘은 날씨도 선선하고 중간중간 쉴 수 있는 장소들도 있어서 아이와 걷기에도 좋았다. 두브로브니크에 와서 짧은 일정으로 구시가지만 둘러볼 계획이라면 이렇게 사람이 없는 겨울에 오는 것도 꽤 괜찮은 계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벽을 중간쯤 도니 해가 중천에 떠서 점점 더워졌다. 마치 동화 '해님과 바람'처럼 우리 나그네들은 입고 있던 외투를 하나씩 벗었다.
성벽 옆으로 보면 빨래를 걸어놓고 오렌지, 레몬 나무를 키우는 가정집들이 보인다. 구시가지의 건물 특성상 1층에는 가게나 식당이 운영되고 2층에는 주거용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집 빨래를 모르는 사람들이 보거나, 부엌 창 밖으로 관광객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신경 쓰일 법도 한데, 아마도 이 멋진 중세 시대의 성벽이 지켜주고 있는 집에 사는 자가 짊어져야 할 무게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 삶이 모두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였다.
천천히 둘러보며 한 시간 즈음 걸었을까, 드디어 우리가 시작했던 파일 게이트 쪽 구시가지의 반대쪽에 다다랐다. 다시 반대편으로 돌아가 출발 지점까지 걸어가 볼까 하다가 조금 지쳐 보이기 시작하는 우리 집 에너자이저의 눈치를 살피고는 그냥 성벽을 내려오기로 했다. '(아쉽더라도) 그쳐야 할 때에 그칠 줄 알아야 한다'는 옛 성현의 지혜가 아이와 여행할 때도 쓰이는 거라는 걸 이제 나도 남편도 깨달았다.
어제의 스르지 산에 이어, 오늘의 성벽 투어까지 했으니 두브로브니크의 여행자가 해야 될 큰 숙제 두 개는 다 마친 것 같아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우리는 어제 두브로브니크 패스를 사면서 받은 버스 이용권을 한 번 써보기로 하고 버스를 기다려 우리가 처음 출발했던 파일 게이트로 돌아왔다. 외모로 보면 누가 보더라도 외지인이지만, 마을버스도 탈 줄 알고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이 이젠 다 눈에 익은 우리들의 마음만은 이제 현지인이 다 된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