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 심리학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심리학파인 실존주의 심리학이 유럽에서 시작해 미국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키에르케고르, 니체, 하이데거, 사르트르 등의 철학자로 시작해서 루트비히 빈스방거, 메다드 보스, 빅터 프랭클 등의 심리학자들이 이 학파를 연구했다. 그중에서도 최근 50년 동안 미국에서 실존주의 심리학을 가장 대표하는 심리학자는 롤로메이이다. 그는 심리치료자로서 통제된 과학연구보다 임상적 실험에 의지했다. 그는 사람들이 현재의 경험의 세상 속에 살고 있다고 보았고, 그들이 되는 사람에 책임이 있다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차이는 운명을 직시하고, 자유를 쟁취하며, 책임감을 가지고 진실되게 세상을 마주하는 것에 있다고 했다. 인간본성이론에 있어서 프로이트의 이론은 결정론적이고, 과거의 영향을 바라보며 비관주의적이었던 반면, 메이의 이론은 좀 더 자유의지와 미래의 영향에 의지하며 낙관적으로 바라봤다. 메이의 이론엔 대표적으로 죄책감, 의도성, 돌봄, 사랑, 그리고 의지, 자유와 운명이 있다. 죄책감은 한 사람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을 실패할 때 떠오르는데, 세상에서의 세 가지 관계 인식 실패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세 가지 관계에는 umwelt (세상), mitwelt(타인), eigenwelt(자신)가 있다. 이 관계를 인식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받아들이면 관계를 개선할 수 있지만, 거절하면 신경증적이게 되고, 우울하게 되며, 관계도 안 좋게 된다. 의도성은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고, 미래에 대해 결정하게 하는 구조이다. 그들이 선택하고, 고난을 극복하고, 인생에서의 의미를 찾는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심리학적 성장과 관련 있는 구조이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은 그 사람이 중요하다는 듯이 대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은 그의 가치와 성장을 인정하고 추구하는 것이고, 의지는 스스로의 삶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의식적인 능력이다. 사람의 선택, 관계, 그리고 성장에서의 헌신을 모양 짓기에 이 세 가지는 역시 심리성장에 영향을 미친다. 마지막으로 자유와 운명은 메이에 의해 같은 단어로 사용되었는데, 그 의미는 우리 모두 끝,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능력을 뜻한다. 우리가 비록 죽는다는 사실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선택을 다르게 하고 관계를 다르게 맺음으로써 바꿀 수 있다.
롤로 메이는 1909년, 오하이오에서 잘 교육받지 못한 부모 아래서 여섯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의 가족은 미시간으로 이사했다. 그의 부모는 자주 싸웠고, 결국 떨어져서 지냈으며, 메이와 가깝지는 않았다. 메이는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대신 세인트 클레어 강 앞에서 자주 혼자 놀았고, 미시간 학교에서보다 강에서 더 많이 배웠다고 주장했다. 청소년 시기부터는 쭈욱 예술과 문학에 흥미를 보였다. 미시간 주립대에서 영어를 전공했으나, 급진적인 학생 잡지에 편집자 역할을 한다는 이유로 그만둬야 했다. 오하이오로 가서 대학을 졸업했다. 에릭슨과 비슷하게 동서유럽을 돌아다니며 영어를 가르치면서 그곳의 예술을 느꼈다. 그러다 외롭기 시작해서 영어강사의 일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으나 그럴수록 덜 효과적이게 되었다. 침대에 더 오래 머물렀고, 삶의 새로운 목표를 찾아야 했다. 아들러의 여름 세미나도 듣고, 칼 로저스가 다녔던 신학교에도 다녔다. 그러나 그 목적은 목회자가 되는 것이 아닌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묻는 것이었다. 철학자 폴 틸리히를 만나 그와 30년 이상의 우정을 지속했다. 그러나 신학교에서 석사과정까지 마치면서 목회자로 부임하게 되었고, 2년 동안 일했으나, 무의미함을 느꼈고, 심리학에 대한 그의 흥미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시티 칼리지 오브 뉴욕에서 남학생 카운슬러로 일하면서 윌리엄 알란슨 화이트 기관에서 정신분석학을 공부했다. 이 기관은 해리 설리반이 공동창립자이자 총장으로 있었으며, 그녀와 만나면서 심리치료는 환자뿐만 아니라 치료자의 삶도 개선하는 과정임을 배웠다. 그때 당시 에리히 프롬도 직원으로 있었기에 그와도 만났다. 1946년 메이 개인치료를 열었으며, 2년 후에는 윌리엄 알란슨 화이트 기관에서 직원으로도 있었다. 1949년, 40살의 나이에 콜롬비아 대학에서 임상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74년까지 윌리엄 알란슨 화이트 기관에서 정신의학 조교수로 일했다. 박사 학위를 받기 전에 그의 30대 시절, 그는 치료법이 없었던 결핵에 걸려 3년 동안 요양소에 있었으며, 삶의 불확실성 속에서 살려면 수동적인 것이 아닌 능동적인 과정을 거쳐야 함을 깨달았다. 병에서 회복 후 많은 책을 쓰고, 상을 받고, 여러 명성대학에서 일을 했다. 1969년, 30년 동안 함께한 그의 첫 아내와 이혼했고, 두 번째 아내와도 곧 이혼했다. 1994년 2년의 건강악화 후에 그의 세 번째 아내, 아들, 그리고 쌍둥이 딸을 남기고 캘리포니아에서 죽게 된다.
메이가 바라본 인간본성 6가지 기준을 살펴보자.
1. 메이는 비록 불안과 책임감이 함께 따라오지만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믿었다.
2. 사회 안 대인관계뿐만 아니라 성별, 체형, 죽음 등의 생물학적 요인들도 성격형성에 기여하기에 생물학적 그리고 사회적 영향 사이에서 중간 위치를 차지했다.
3. 메이는 어린 시절의 경험이 어른의 성격을 만드는데 잠재적인 영향을 주지만, 인간은 모두 미래를 향한 특정한 목표와 운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4. 모든 인간은 운명에 의해 정해진 한계 안에서 다른 선택을 하며 성격을 스스로 만들어가기에 독특하다고 했다.
5. 인간이 새로운 상징과 신화를 찾아야 하는 정체기에 있지만, 그것이 새로운 정신을 불어넣을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6. 인간이 자유의지를 발휘할 자기 인식을 의식적으로 개발할 수 있지만, 종종 이 능력은 경작되지 않고 묻히기에 의식과 무의식의 영향 사이에서는 중간 위치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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