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 걸음
"이번엔 몇 등했니?"
잠시 얼굴을 붉히고 들릴 듯 말 듯 작게 말을 꺼냈다.
"뭐라고? 응. 그래그래. 등수가 중요해. 좀 더 치고 올라가야 할 텐데. 얘야 애 학원은 보내고 있니? 공부하려고 할 때 밀어줘야 하는 건데."
악의는 없었지만 친척 할머니의 말씀대로 해줄 만큼 집의 형편이 좋지는 않았다. 선하다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는 없지만 좋은 의도는 맞다. 오랜만에 만난 손주에게 해주고 싶었던 인생의 조언을 전해주셨다. 익숙한 본인의 방식으로.
하지만 좋은 의도와 달리 여러 사람에게 아픈 말이 되어버렸다.
아들에게 좋은 학원을 보내줄 수 없는 부모는 비참해졌고 부모의 사정을 뻔히 알고 있는 아들은 속앓이만 할 뿐이었다.
씁쓸히 담배를 태우러 가는 아빠의 뒷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이 교차했지만 무엇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돈? 돈 때문인가?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야. 맞을 거야. 돈이 문제지.
시간이 흐르고 다시 또 모이게 된 명절. 익숙하게 기계적으로 인사를 나눴다. 안부를 묻고 근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다시 또 도돌이표처럼 같은 상황이 펼쳐진다.
성적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이어지는 짧은 침묵. 앞으로가 중요한 시기니 공부 방향을 어떻게 하는 게 좋다로 마무리. 그리고 밀려오는 씁쓸함. 그 씁쓸함은 학생이었던 나보다는 어른인 아빠가 더 크게 느꼈던 거 같다. 그래서였을까?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친척 모임에 가지 않으셨다.
'어째서 좋은 의도를 가지고 꺼낸 말에도 우리는 상처를 받을까?'
어린 나에게 드는 의혹. 의구심.
'할머니의 잘못일까?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빠의 잘못일까?'
결론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
사람은 보통 자기가 속한 환경에 익숙해지고 익숙해진 걸 토대로 이야기한다. 어쩌면 그래서 경험의 폭이 중요한 건 아닐까?
할머니는 결코 나쁜 의도로 우리에게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풍족하지 않게 살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셨을 것이다. 단지 우리가 어느 정도로 풍족하지 않은지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었고 학원에 보낸다는 게 어떤 부담으로 작용할지 아실 수가 없던 것뿐이다.
반대로 아빠는 여유가 없었다. 당장 일하지 않으면 내일은 굶어야 하는 삶의 반복 속에서 가볍게 혹은 지나가듯 꺼내는 이야기에도 반응할 수 있을만한 여유가 사라진 지는 오래되었다.
결국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 뿐 어떻게 살았느냐 또는 살아가느냐에 따라 삶의 양상이 달라진다. 그렇게 얻게 된 경험을 토대로 건네는 말은 더 이상 상대에게 위로나 조언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벌어지는 간극과 생기는 서운함. 밀려오는 부담감.
그렇게 가까웠던 이와 멀어진다. 분명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후회할 때쯤엔 이미 자석의 같은 극처럼 서로를 밀어내 버렸다.
그때로부터 한참 시간이 지나고 결혼을 하게 되면서 오랜만에 할머니를 만나 뵙게 되었다.
"오랜만이구나. 아휴 잘 커줘서 고맙다. 이게 몇 년 만이니 그래."
할머니의 눈가엔 그리움의 시간만큼 슬픔이 맺혀 있었다. 여전히 할머니는 내게 어려운 분이셨다. 그래도 과거에 부끄러워만 하던 모습과 달리 이제는 제법 인사말을 건넬 줄 알게 되었다.
"그래. 어떻게 집은 구했고? 회사는 잘 다니지?"
"어.. 네."
"그래. 둘이서 잘 살면 되지 뭐."
이상하다. 왜 또 부담스럽지? 더 이상 똑같은 말을 듣고 있지 않은데도. 예전과 지금의 차이라면 아빠가 있고 없고의 차이랄까. 이제는 할머니에게 직접 말을 듣는 주체가 내가 되어 있다는 것.
여전히 할머니에게는 좋은 의도가 느껴졌다. 다만 그 의도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가 있을 뿐. 할머니가 꺼낸 질문에 답하기엔 사회적으로 이뤄 놓은 게 너무 없었고 그래서 난 부끄러웠나 보다.
그때로부터 어느덧 10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살고 있는 거리가 멀어진 것도 있고 뵙고 지내지 못한 시간도 긴 탓에 심리적 거리감이 있는 편이다. 그래서일까. 누군가를 통해서만 건너 건너 할머니의 소식을 듣는다.
'10년 전 할머니의 질문에 이제는 나름 당당하게 답을 드릴 수도 있을 거 같은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굳이 찾아뵐 자신은 없다. 분명 반갑고 애틋한 감정이 들 텐데 찾아뵙진 못하겠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시 또 새로운 질문을 듣게 되면 그 질문에 바로 답을 하지 못할 내 모습이 보기 싫어서일까? 그렇게 또 한참 동안 혼자 끙끙 앓으며 질문에 대한 답을 만들어내기 위해 시간을 보내기 싫어서일까?
의도와 상관없이 부담이라는 건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인가 보다. 문득 과거의 내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나의 말과 행동이 누군가에게 부담이 되진 않았을까?'
분명 그랬을 것이다. 단지 내가 의식하지 못했을 뿐 나도 누군가에게 부담을 줬을 거다. 어쩌면 앞으로도 만날 누군가에게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분명 내게는 나쁜 의도는 없었다. 단지 내가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는 한계가 그 정도 일뿐.
그렇다고 말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는데.. 말을 아끼는 법을 배워보자. 하지만 쉽지 않다. 이상하게 누군가를 만나면 언제나 내 얘기를 하고 싶다. 성공하지 않은 삶임에도 왜 그리도 나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건지.
'말은 아끼고 최대한 들어주자. 부담을 주지 말자.'
그렇게 부담을 주지 않고 싶은 나만의 노력이 시작되었다. 물론 잘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