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걸음
40대가 되면 다를 줄 알았다. 뭔가 갑자기 깨달음을 얻어 변신이라도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20대의 끝자락에도 똑같이 느꼈었지만 그냥 표시된 숫자만 변하는 게 전부였다. 그나마 좀 달라진 게 있다면 ‘회사를 그만둔 것’?
용기가 많이 필요했다. 보통 퇴사 얘기를 주변 사람한테 해도 그냥 지나가는 얘기구나 정도로만 생각할 텐데 어느 날 정신을 차려 보니 정말 저질러 버렸다. 하지만 그것도 개인한테나 큰 일이지 다른 사람의 삶에 큰 영향을 주는 건 아니다. 정말 웃기게도 나를 위해 퇴사를 한 건데도 남을 의식하며 살고 있다니. 아닌 척했지만 누구보다 관심을 받고 싶었던 거 같다.
회사를 그만두니 시간이 많아졌다. 그런데 불안감의 크기는 회사 다닐 때보다 훨씬 커져 있었다. 매월 계약된 날짜에 맞춰 들어오던 돈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게 되자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퇴사를 한 두 번 한 것도 아닌데 뭘 이것 가지고 그래! 힘내자.’
근데 뭘 하기 위해 힘을 내야 할지 방향도 잡지 못한 상태였다. 여기까지 보면 정말 대책 없이 일을 접은 한심한 40대 아저씨의 푸념처럼 보일 거 같다. (근데 뭐 크게 틀린 말은 아닌 거 같네..) 지인 중에 물어보는 사람이 있었다.
”사실 금수저 아니에요? 혹시 복권 당첨?”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희미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도 퇴사 후 맞이하는 매일 아침이 좋았다. 비가 오는 날 멍하니 바깥 풍경을 보는 것도 좋았고 조금 늦게 눈을 떴는데 빨리 준비할 필요가 없는 아침도 좋았다. (보통 아무리 늦게 눈을 떠도 8시 정도긴 하네요. 핑계라면 핑계.)
”참 좋다 그치?”
”응 그러게. 근데 우리 뭐 먹고살아?”
”하하..”
좋다가도 아내와 난 불쑥 생겨나는 불안감을 느꼈다. 당연한 일이겠지. 근데 사실 지금도 불안하다.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불안감은 같이 가야 하는 친구 같은 감정일 것만 같다. 그러던 차에 붙잡고 해 볼 뭔가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뭘 하면 좋을까?’
생각보다 잘할 수 있는 건 떠오르지 않았다. 오랫동안 일해왔던 기술을 이용해 뭔가를 그럴싸하게 만들어 내보면 어떨까 싶었지만 그럴싸하게 못 만들 거라 생각해 바로 생각을 접었다. 그래도 뭔가를 하긴 해야 할 거 같아 이것저것 타자를 쳐가며 정리했다. 봐줄 사람도 없이 그렇게 매일 하고 싶은 일을 하나하나 적어 나갔다. 적다 보니 신기하게 하고 싶은 게 생겨났다.
’글이라도 써보자.’
결코 글쓰기가 만만하게 보여서는 아니다. 단지 붙잡고 할 만한 게 필요했는데 최근에 내가 매일 하는 게 결국 글쓰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왠지 재밌을 거 같았다. 쓰고 싶은 게 많으니 원하기만 하면 마음대로 글이 막 써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40대를 재미있게 보내기 위한 첫 번째 친구로 ‘글쓰기’를 선택했다.
혼자만 보던 글에서 공유하고 소통하기 위한 글을 써야 하는데 방법을 몰랐다. 솔직히 초등학생 이후로는 일기 한 장을 써본 적 없다 보니 사태는 더 심각했다. 어찌어찌 글을 하나 쓰긴 했는데 막상 공유할 생각을 하니 부끄럽고 두려웠다.
’흑역사 하나 생기는 거 아니야..’
’누가 이런 글을 봐주겠어.’
하지만 시작을 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뭘 올리기라도 해야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알 수 있을 테니. 눈 딱 감고 발행을 결심한다. 초조하다.
’혹시 누가 봐줬을까? 잠깐만. 벌써 누군가를 의식하며 글을 써야 할 정도로 내가 뭘 이뤘나? 이제 겨우 첫 글을 올리는 것뿐이었는데 벌써부터 이상한 생각이나 하고 말이야.’
40대의 재미를 찾겠다던 목표와 달리 또다시 타인의 시선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야. 잘했어. 이렇게라도 해보는 게 어디야.’
퇴사 후 다짐한 게 하나 있었다.
’나한테 너무 모질게 굴지 말자. 그동안 많이 다쳤으니까.’
그리고 생각과 반대로 다시 또 조회수를 확인한다. 처음으로 달린 누군가의 따뜻한 좋아요 하나.
’그래. 난 원래 좀 관종이야. 이젠 인정해야 해.’
그렇게 40대를 보낼 재미 하나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