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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센짱 Jan 04. 2022

시작하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어떻게 시작했냐는 질문에 대한 아주 긴 사설

어떻게 이런 커뮤니티를 시작할 결심을 하게 되었느냐, 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하지만 매번 깔끔한 대답을 내는 데 실패한다. 돌연한 어떤 하나의 결심으로 시작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상류의 작은 물줄기들이 합쳐져 한강이 되는 것과 같은 흐름이었다. 그래서 이해를 돕기 위해 나의 주거 방식 변천사과 내 개인적 성향에 대해 조금 소개하고자 한다.  


일곱 명

어렸을 때 나는 대식구로 살았다. 많을 때는 일곱 명까지도 갔다. 부모님, 나, 동생, 할머니 그리고 미혼의 막내고모와 막내삼촌까지. 처음엔 할머니 방에서 동생과 같이 잤고, 막내 고모가 시집을 간 후 빈 방이 내 방이 되었다. 다락방은 우리 집안의 한 때 기대주였다가 트러블메이커로 추락한 삼촌이 지냈다. 삼촌은 자주 방을 비웠고, 그러면 이 방은 집에서 5분 거리에 살던 사촌들과 우리 남매의 아지트가 되었다. 그 외에도 숨바꼭질을 하고 놀기엔 숨을 공간이 많은 재밌는 집이었다. 거실이 넓은 편이었는데도 명절이나 제사가 되면 모든 사람들이 앉을 수 없을 정도로 집 안이 바글바글해졌다. 어릴 때부터 쑥쓰러움은 많았는데 나는 이런 왁자지껄함을 좋아했다. 하지만 이내 막내고모와 삼촌이 각각 결혼 및 독립을 하고, 부모님의 합의로 할머니를 따로 모시게 되면서 점차 우리 가족 역시 현대 핵가족의 구색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여섯 명

중학교 2학년 겨울, 나는 좀 일찍부터 부모님과 따로 떨어져 살기 시작했다. 고모네 가족이 인근 교육 도시인 진주로 이사하는데 나와 동생이 더부살이로 끼게 됐다. 진주의 더 나은 교육 환경과 기회를 위해 고향을 탈출한 것이다. 사촌동생 두 명과 친남동생 하나까지, 남동생 세 명과의 간식 전쟁은 지독했다. 아, 어떻게서든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그것이 원동력이 된 것이 분명하다. 다행히 대구의 기숙사 고등학교에 합격해 간식 싸움에서 패전하기 일쑤였던 서러움을 1년 만에 청산했다. 


네 명
고등학교의 기숙사는 집이 아니라 숙소라는 말이 적합한 곳이었다. 2층 침대가 나란히 두개 놓인 코딱지만한 방에 네 명이서 함께 지냈다. 하지만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잠자는 시간 빼고 전부 학교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기상시간도 소등시간도 군대처럼 일률적이었다. 유일한 문제는 공립학교인 탓에 휴일이 되면 기숙사가 문을 닫는 점이었다. 그럼 한명의 예외없이 모두 집으로 가야 했다. 토요일 점심이 되면 한주의 빨래감과 주말동안 공부할 거리를 채운 캐리어 가방을 각자 드르륵 드르륵 거리며 집으로 가는 소리가 학교 골목에 퍼졌다. 다만 나 같이 대구 출신이 아닌 경우
 이 주말이 성가시기 짝이 없었다. 고향으로 가는 직행 버스도 없어 도합 편도 3시간을 집에 돌아가는데 써야 했다. 한 학기가 채 끝나기 전에 도저히 못하겠다고 부모님께 사정해 학교 앞에 작은 원룸을 구했다.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그러니까 17살일 때 물리적으로나마 이미 독립이 진행되어 버렸다
 

일 인
주말에만 지내는 반쪽짜리 자취였지만 들뜨는 사건이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자취를 시작하는 것만으로 마치 가장 먼저 어른이 된 느낌이었달까? 어렸을 때 안경이 끼고 싶어서 보이는 숫자도 잘 안보인다고 거짓말을 한 것처럼, 어쩌면 그때의 나 역시 자취를 일찍 시작하고 싶어서 내 피로감을 과장했을지도 모른다. 이른 나이에 얻게 된 자취방은 학교에서의 좋은 접근성에 힘 잎어
급속하게 친구들 사이에서 아지트화 되었다. 옥상에서 절친들과 희희낙낙 고기를 구어먹으면서 이것이야말로 자취의 맛이로구나, 하고 우쭐댔다. 


그렇게 신나기만 할 줄 알았는데 그 흐름을 탁 하니 끊고 무언가 스윽 스며들었다. 바로 외로움이었다. 도대체 이 마음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하는지 몰라 상당히 헤맸다. 무교이지만 성당에 찾아갔고, 나이를 속이고 슈퍼에서 소주를 샀다(노안 만세!). '드라마에서 볼 때 힘들 때 다들 소주를 사서 마시면 괜찮아 보였는데.... 이 쓰고 맛없는 걸 도대체 왜 마시는 걸까?' 외로움만큼이나 소주의 맛도 이해하기 어려워 갸우뚱 거리며 내 자취 연대기가 시작되었다. 

 

두 명

이른 나이에 자취를 시작해서일까, 혼자서 사는 것에 대한 환상도 일찍 깨졌다. 첫 자취 시작으로부터 거의 20년 가까이 흘렀지만 그 중 순수하게 원룸에서 혼자서만 살았던 시간은 다 합치면 7년 남짓일 것이다. 


그말은 즉슨 늘 누군가와 같이 살아왔다는 말이다. 한 방을 둘이서 나눠 쓰기도 하고, 투룸에 살기도 했다. 그 룸메이트는 대학교 동기였다가, 인터넷 상 룸메/하메 구하기 게시판에서 만난 일면식 없던 사람이기도 했다가, 가장 가깝고도 먼 존재, 친동생이기도 했다. 친구가 쓰는 침대 옆 바닥에 요를 깔고 자기도 했고, 한 침대에서 같이 자기도 했다. 대등한 권리를 가지고 함께 방이나 집을 쉐어하기도 하고, 내가 남의 집에서 신세 지거나, 카우치서퍼들을 호스트 하기도 했다. 


지금은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 싶은데, 그땐 그렇게 불편할 줄 몰랐다. 불편한 순간이 있어도 혼자 살고 싶어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 집은 내게 어쩔 수 없이 청해야 하는 잠을 자기 위해 필요한 등 누일 공간, 그 동안 비바람과 눈에서 보호해줄 벽의 조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주거에 들이는 돈이 제일 아까웠다. 밖순이라서 그리 살 수 있었고, 그렇게 살았기에 더욱 밖순이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세 명 +a

2015년에는 결국 회사를 퇴사하고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그 생활이 극대화가 되었다. 민달팽이 생활 만렙을 향해 가던 18년 봄, 떠돌이 생활은 중단되었다. 지인의 스타트업에 합류하게 되었는데 원격근무를 허용하지 않았다. 아쉽지만 백팩을 내려놓고 내 몸을 숨길 껍데기를 구해야할 때였다. 


"어떤 집을 찾으세요?" 

부동산 사장님의 질문에, 나는 느닷없이 "어,, 쓰리룸이요"라고 대답해버렸다. 사장님의 질문을 듣기 전까지 나는 내게 선택권이 있다는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내 선택권은 원룸에서 혼자 사는 것 뿐이라는 것을 상정하고 있었다. 어떤 집을 찾냐는 질문은 사실 그것이 유일한 선택지는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과도 같았다. 오랜만의 정착 생활을 원룸살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1인 가구에게 가장 보편적 주거 방식이라는 '원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집에 잘 붙어있지 않아 하루에 몇번 쓸까 말까한 주방, 거실, 욕실을 독점적으로 쓴다는 것이 공간적으로도 자원적으로도 심각한 낭비 아닌가. 게다가 그 당시 삼십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결혼과 출산 등으로 빠르게 친구들이 없어지고 있었다. 내가 언제 결혼할지도, 혹은 결혼을 영영 안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동네 친구를 만들려고 노력도 해보고 있어본 적도 있지만 서로 바빠 같은 동네에 있어도 막상 자주 만날 수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 더 게을러져서 약속 잡는 것도 피곤했다. 동네친구로는 부족하다, 내게 동거인들이 필요해! 그렇게 결론에 이르렀다.


오랜 꿈이었던 여럿이 같이 살아보자. 다시 대가족으로 돌아가자. 지금을 놓치면 2년 후엔 다들 결혼하고 같이 살자고 초대할 사람이 아무도 안 남아있을지도 몰라! 


"친구들이랑 살 예정이에요. 제가 먼저 대표로 보려고 해요." 

결혼했는지, 신혼집을 찾는지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충 대답했지만, 정해진 하우스메이트는 없었다. 


가장 이상적인 순서는 사람을 먼저 구하고, 커뮤니티를 만들어가면서, 집을 구하는 것이 마지막이겠지만, 그렇게 천천히 가다간 자칫 꿈이 꿈으로만 남게 하고 싶지 않았다. 계획하고 준비하는 중에 그 중 누군가 또 결혼하고, 해외로, 지방으로 가는 등의 변수가 충분히 생길 수 있다. 그럴 바엔 먼저 쓰리룸을 질러놓고 같이 살 사람을 나중에 찾아 보기로 마음이 앞서기 시작했다. 이렇게 무턱대고 쓰리룸 몇 군데를 둘러보고 고민하고 있을 때 예상치 못한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함께 부동산 투어를 했던 하연 언니였다. 


"같이 살아보는 게 어때?"


언니네 부부도 오랫동안 친구들과 사는 커뮤니티리빙을 해온 경력자였다. 당연히 YES YES YES를 외쳤다. 망원동을 같이 둘러보면서 두 사람과 같이 살면 좋겠다곤 생각했지만 결혼 후에도 커뮤니티 리빙을 할 거라 기대하지 않았기에 물어볼 생각도 못했는데, 먼저 물어봐 준 것이었다. 너무 기쁘고 설레었다. 나는 한 가지 조건으로 외국인 친구들을 카우치서핑이나 에어비앤비 등으로 호스팅 하는 것이 괜찮냐고 물었고, 1년간의 세계일주에서 돌아온 두 사람이어서 재밌을 것 같다고 화답해주어 우리의 함께 살기는 급물살을 탔다. 언니 오빠의 부지런한 발품으로 망리단 길에 작지만 깨끗하고 채광이 좋은 쓰리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18년도 봄 '커뮤니티 섬'이라는 이름으로 둥지를 틀었다. 각자의 친구들을 가득가득 불러 집들이를 하고, 새벽에 쏘카를 빌려서 용산 CGV에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하고, 포천에서 열린 DMZ 피스트레인 페스티벌에 놀러도 가고, 함께 투표도 하고, 제대로 크리스마스 파티도 열었다. 그 외 다양하고 많은 추억들을 쌓았다. 동네 친구들이 종종 와서 거실에서 코워킹했다. 1년간 여러 외국인 친구들이 다녀갔다. 방은 세 개였지만 많을 땐 6명의 사람이 지내기도 했다. 거실의 소파베드까지 다 펼쳐서 크지 않은 집의 활용도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속된 말로 뽕을 뽑았다. 그만큼 즐거움의 농도도 진했는데, 그 농도를 감당하기에 쓰리룸은 좀 작았다. 


"우리는 이제 외국인 노마드 친구들을 그만 호스트 하고 싶어. "


청천벽력 같았던 소식이었다. 두 사람은 우리가 호스트하는 노마드 친구들과의 문화 차이로 인해 집에서 더이상 안정감을 느낄 수 없게 되었고, 피로감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몇 가지 옵션을 두고 함께 고민하다가 결국 우린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 그것이 서울눅스, 현재 우리 코리빙 커뮤니티 여정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그러니까 시작을 했다기 보다는, 시작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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