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항상 어떤 약속장소에 가더라도 훨~씬 더 일찍 도착한다. 물론 늦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나도 일찍 도착하는 편이다. 차가 밀리거나 늦을 일이 없는 경우엔 주로 5분에서 10분 정도는 일찍 도착하는 편이고, 서울에 나가는 날에는 최소 30분은 일찍 도착하려고 일정을 잡는다. 하지만 남편은 그 정도가 아니라 몇 시간을 일찍 도착한다. 그리고는 근처 카페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면서 시간을 보낸다. 거의 예외 없이 그렇게 한다.
남편이 이렇게 빨리 나가는 이유가 뭘까?
남편은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장소에 (예측 불가능),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 (특히 그런 사람들이 다수가 되면 불안감은 몇 배가 된다)을 만나는 것이 너무나도 싫다고 했다. 예측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익숙한 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경우에도 예측 불가능한 상황은 언제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항상 심리적으로 대비하기 위한 방법이 아닌가 싶다.
이런 남편을 더욱 스트레스받게 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걸 확인해 볼 겸 (짓궂게도) 언젠가 남편에게 테스트를 해 봤다.
남편은 그날 당일 서울을 가야 했는데 오전 9시쯤 나가겠다고 전날 미리 계획을 세워놨었다.
8시 반인데 어쩐 일인지 남편이 서두르지 않았다. 내가 전날 9시에 나가기로 했던 걸 상기시켜 주면 분명 허둥지둥 서두를 것이 분명하였기에 그냥 모른 척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남편: 내가 어제 몇 시에 출발한다고 했었지? (시계를 보며)
나: 어.. 뭐 9시쯤에 (최대한 모호하게) 출발을 할까 했지만 뭐 9시 넘어도 시간 넉넉하지 않아?
남편: (잠시 주춤한 후) 그렇지, 넉넉하겠지?(그러고는 9시 전에 나갈 준비를 다 마쳤다)
(참고로 2시에 약속이 하나 있었고, 그전에 픽업해야 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건 시간이 정해져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우리 집에서 지하철을 타면 40분이면 홍대까지 간다)
나: 내가 전철역까지 태워줄게.
남편: 안 그래도 돼. 그냥 버스 타고 가면 돼.
나: 비도 오는데 버스 안 기다려도 되고, 내가 데려다주면 편하잖아.
남편: 그렇긴 그렇지. 그래 그럼.
(남편이 신발을 신는 동안 나는 일부러 먼저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나가서 엘리베이터를 눌러놓기 위해서였다)
남편: (눈에 띄게 스트레스 받아하며) 왜 무슨 일 있어? 우리 늦었어? 왜 이렇게 서둘러??
나: 아니 그냥 엘베 곧 올 수도 있으니까..
남편: (진정하려 노력하며 지하주차장에 내려가 차에 탔다)
나는 이쯤에서 가만히 입 닫고 있었어야 했는데.. 테스트 겸(?) 말했다.
나: 지금 가면 40분쯤 도착할 거고, 그럼 타는 곳까지 빨리 걸어가면 45분 차도 탈 수 있을 거고, 천천히 걸어감 그 담 열차가 십 분쯤 뒤에 올거니까 55분 걸 타면 되겠다. 이러든 저러든 시간은 넉넉하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편은 엄청난 스트레스에 휩싸였다. 갑자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여유롭게 걸어가서 오는 다음 열차를 타려고 다 "계획"을 세워뒀는데 내가 그 계획을 망치려고 했던 거였다.
나: 아~~ 정말 미안 미안! 난 내 바로 앞에서 열차를 놓칠 때 너무 싫더라고.. 그래서 혹시 당신도 원하면 조금 빨리 걸어서 기다리는 시간을 줄이면 좋을 것 같아서.. 아, 정말 미안! 계획이 변경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했어. 미안 미안~~~~ 긴장 풀고~~ 시간 엄~~~청 많으니까 천천히 걸어가~~ 잘 다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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