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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폼폼 Oct 18. 2022

다문화 학생들에게 시험과 평가란

단지 한국어 때문에, 그 벽 때문에

1.  

  J가 국어 수행평가가 있다며 바삐 무언가를 외우고 있다. 무엇인지 살짝 들여다보니, 20여 개 정도 되는 속담들과 그 뜻이 적혀있다. 나는 별생각 없이 웃으며 "오우, 속담 외우는 게 수행평가인가 보네? 많이 외웠어?"라며 실없는 위로를 던진다. J는 속담을 중얼중얼거리며 외우다가 새된 목소리로 비명을 내지른다. "흐아아아아아-!"


  비명 속에 담긴 마음도 모른 채 나는 여전히 실없는 위로를 건넨다. "왜애~ 어려워? 잘 안 외워져?" J는 "가마귀, 가마귀날자, 악! 까.마.귀. 날자 으에에에웹- 탄오가 노무 어려워요."라고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어 "영어에도 비슷한 속담 있습니다. 이거 속담, 뜻이가 다 알겠는데 한국어 탄오가 노무 어렵다. 망했어요. 으아아악-"


  J의 말을 듣고 나서야 또 무심하고, 또 둔감했음을 깨달은 한국어학급 담임교사였다. 내게는 종이에 빼곡히 적혀있는 속담이 익숙하고 가벼운 문장들일지 몰라도, 필리핀에서 온 지 고작 1년 3개월 즈음 된 J에게는 설면설면한 문장들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로부터 며칠 뒤, 2학년 국어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속담 수행평가 이야기가 나왔다. "아, 그래. 안 그래도 J가 프린트 들고 열심히 외우고 있더라구요~ 어려워하던데.. 몇 개나 시험 치는 거예요? 그거 다 치는 거예요?"라고 넌지시 여쭈어보았다. "그중에서 몇 개만 물어볼 거예요~ 쉬운 속담이라서 괜찮습니다~ 애들 금방 외워요~" 돌아오는 국어 선생님의 답변에 우리 반 아이들을 대변하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나 또한 무심했음이 떠올라 이내 꿀꺽 삼키었다.



2.

  2학기 중간고사 결과가 나왔고, 열심히 공부한 T는 이번에도 국어 점수가 30점대라고 했다. 학습 속도가 다른 친구들보다 조금 느린 T였지만, 작년에 비해 올해 부쩍 한국어 실력이 늘었고, 다문화 학생을 대상으로 국어 방과 후 수업을 진행하면서 이전보다 열심히 하는 게 확연히 눈에 보였다. 뿐만 아니라, 내가 설명한 내용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확인하고자 다시 설명해보게끔 하면 꽤나 정확하게 설명을 하기에 기대를 좀 했었다. 그런데 웬걸, 여전히 30점대라니. T만큼이겠냐마는 나 또한 속으로 적지 않게 실망스러웠다. '왜?! 이번에는 서술형 문항 쓰기 연습도 나름 시켰다고 생각했는데, 왜?!' 성적이 아주 오르지는 못해도 떨어지지는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떨어졌다.


  무슨 연유인지 알고 싶어 T와 중간고사 시험지 리뷰를 했다. T와 문제를 한 땀 한 땀 다시 짚어가며 풀어보니, 평가 문항에 사용된 온갖 단어와 표현을 온전히 알지 못한 채 문제를 풀었으니 맞힐 턱이 없었다. 수업을 하면서 아이들의 한국어 능력을 알고 있는 나는 어려운 단어를 쉬운 단어로 바꾸어 설명해주곤 했다. 하지만 시험지에 나오는 단어와 표현들은 친절할 수 없지 않은가. 결국은 한국어가 문제였다. 

  

  '아이들이 익숙해지도록 어려운 단어를 막 사용해 가며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결국 아이들은 이해한 내용에 얹어 단어까지 함께 공부해야 한단 말인데….' 막막한 마음이 밀려와 하릴없이 젖어들고 있는데, 그때 T가 물어온다. "손생님, 저는 소설 <일가> 내용 다 이해했습니다. 한글 창제도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시험 점수는 왜 낮습니까?" 마음을 쓰리게 하는 질문이었다. 내 막막함을 들키면 아이의 의지가 꺾일까 봐서 별 거 아니라는 듯 "시험지에 있는 단어가 조금 어려워서 그래. 그래서 이번 기말고사 준비할 때에는 지금처럼 중간고사 시험지 보면서, 시험지에 사용된 단어도 같이 공부할 거야. 괜찮아!" 하지만 아무래도 막막함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어 잠시 그 자리에 앉아있다가 생각에 잠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좋은 방법이 없을까?



3.

  전쟁으로 인해 한국에 온 지 약 4개월가량 된 R. 한국의 중학교에 온 이상 R도 수행평가를 피할 수는 없었다. 'test'라는 단어로 심플하게 설명된 수행평가로 인해 R은 꽤나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역사 선생님께서는 R의 입장을 헤아리셨던 걸까. 한국어를 못하는 R에게 냅다 한국어로 수행평가를 하게끔 하는 것은 아무래도 아닌 듯하다며 내게 R이 수행평가를 간략하게나마 모어로 해올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하셨다. 흑인 노예제도에 관한 그림책을 읽고, 소감문을 쓰는 것이 역사 수행평가인데, R이 러시아어로 써 올 수 있게 도와달라고. 러시아어 이중언어 강사님께서 R이 쓴 것을 번역해주시면 참작하여 수행평가를 제출한 것으로 하겠다고.


  기회를 주신 역사 선생님께 감사했다. 3년간 한국어학급을 운영하면서 이처럼 기회를 주신 교과 선생님을 거의 보지 못했기 때문에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또한, 나는 3년 전에 왜 그런 생각을 미처 못했던가. 역사 선생님의 세심한 배려에 힘 입어 R이 역사 수행평가를 제출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노라 약속드리고, 러시아어 이중언어 강사님과 협업하기 위해 설명드렸다. 감사하게도 러시아어 이중언어 강사님께서는 한국어 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 R이 수행평가를 제대로 하려면, 러시아어로 소통하는 편이 좋겠다고 하시며 R의 역사 수행평가를 도맡아 주시겠다고 했다.


  10일 즈음 지났을까, 러시아어 이중언어 강사님께서 전달해주신 R의 소감문은 가히 놀라웠다. R의 신념과 사고의 깊이가 물씬 느껴지는 글이었다. 심지어 강사님께서 한국어로 번역해주신 것을 R은 그림 문자 따라 쓰듯 그대로 옮겨 적어 왔다. A4 2장 반의 분량이었다.


  강사님께서 말씀하시길 R은 며칠 내내 밤늦게까지 수행평가를 하기 위해 매달렸다고 한다. 짧은 시간 동안 R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R이 답답할 때도 있었고, 정말 부끄럽지만 R의 학습 능력을 의심한 적도 있었다. 한국어가 뭐길래, 한국어가 정말 뭐길래, R을 둘러싼 모든 것이 야속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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