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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향여행자 Oct 15. 2023

소(所)는 누가 키우나10 : 아버지 소집지기

아버지를 여행하는 시간, 소집

아버지는 쉬는 날마다 어김없이 카메라를 챙겨 나가곤 하셨어요. 그런 아버지를 따라 곧잘 다녔던 딸이었습니다. 20대 시절을 타지에서 보내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제일 탐탁지 않아 했던 분은 아버지셨어요. 가까이 있지만 너무 먼 사이가 된 부녀였습니다. 서로 반대로 향하던 걸음이 다시 마주 보는 걸음이 될 수 있었던 건 결국 또 여행이었어요.


오랜만에 다시 카메라를 꺼내든 아버지를 마주했습니다. 첫 북토크 때 아버지가 그러시더라고요. 딸들이 중학생이 되고부턴 카메라 앞에 서지 않더라고요.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을 대신하는 것이 저에겐 글이라면, 아버지는 카메라였던 겁니다. 그런데 카메라 앞에 아무도 없으니 더 이상 카메라를 쓸 일이 없으셨던 거죠. 그런 아버지와 함께 카메라를 챙겨 여행을 했습니다. 멀리 가지 않아도 바다가 있고, 산이 있고, 그리고 호수가 있는 고향이 그때 처음으로 좋아졌어요. 그저 태어났으니 살아온 강릉이었으니까요. 당연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면서 다시 보이더라고요.


어릴 때부터 추억을 켜켜이 쌓은 경포호가 여행의 시작점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생태 습지해설사 선생님 덕분에 경포호가 '석호' 라는 걸 처음 알게 되었어요. 석호는 댐에 의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호수가 아닌, 자연적인 힘으로 만들어진 호수입니다. 그런 호수가 강원도 동해안을 따라 18곳이 있다는 이야기에 솔깃했습니다. 강원도 석호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연재를 하고 있던 동아사이언스에서 호수 여행기 연재 코너를 신설해 여행의 시간을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2년 가까이 이어간 여행의 시간은 한 권의 책이 되기도 했습니다. 첫 책 <뷰레이크타임> 은 아버지의 사진, 저의 글, 그리고 동생의 디자인으로 완성되었어요.


그렇게 책을 직접 만든 경험은 또 다른 책을 만드는 경험으로 이어지고, 책을 만든 경험을 나누는 강의로 이어졌습니다. 아버지와의 동행 취재 일도 부쩍 늘어났습니다. 같은 곳을 아버지는 사진으로 담고, 저는 글로 담는 시간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아버지를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닮은 점도 하나둘 발견하게 되더라고요. 근사한 풍경을 만나면 발걸음을 멈추고 눈으로 먼저 담고, 그다음 카메라에 담는 모습.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자연스레 저의 피사체가 되었습니다.


방황의 시기가 꼭 10대에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서른 살에 알았을 때, 아버지는 오십 다섯 살에도 있다고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방황하는 아버지와 저를 바라보는 어머니는 오죽 애가 타셨을까 싶어요. 어머니께는 늘 죄송한 마음이 큽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와 제가 방황의 시기가 겹쳐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 시기가 맞지 않았다면 같이 여행을 하는 시간도, 함께 소집을 하는 시간도 허락되지 않았을 테니까요.


2년의 여행 시간, 그리고 4년의 소집을 꾸려간 시간 속에는 늘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안정된 길에서 발걸음을 돌려 불안정한 길을 택한 딸. 그런 딸을 혼내면서도 결국 그 길을 함께 걸어가 주는 것도 아버지입니다. 여행을 함께한 시간 속에선 아버지와 닮은 점을 발견했다면, 소집을 함께하는 과정 속에선 아버지와 다른 점을 많이 발견하게 돼요. 그리고 아버지의 달라진 점도 느끼게 됩니다.


소집의 회색 벽이 마음에 들지 않는 아버지는 소집 벽을 하얗게 칠하고 싶어 하셨어요. 절대로 안 된다고 결사반대를 하는 저 때문에 포기하셨죠. 그런 아버지는 지금도 적막한 회색 벽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입구 옆에 어느 날은 의자를 갖다 놓으시더니, 또 어느 날은 화분 몇 개를 사 와 옮겨 심더라고요. 그래도 뭔가 아쉬워서 나무 한 그루를 심으셨습니다. 이름은 수사해당화라고 하더라고요. '산뜻한 미소'라는 꽃말처럼, 소집이 문을 연 4월에 분홍 꽃이 만발해 마음을 환하게 해주는 나무랍니다. 포스터 게시대도 만들어 부착하고, 뒤편 벽 쪽엔 소 그림도 살포시 그린 아버지. 그렇게 곳곳에 아버지의 손때 묻은 추억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다른 건 다 좋은데, 딱 한 가지 여전히 몹시 싫은 것이 있어요. 감자적본부 옆쪽 벽에 큼지막하게 있는 '소집 갤러리 카페' 간판이에요. 어느 날 보니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더라고요. 아버지는 골목 안으로 들어와야 보이는 소집의 위치를 퍽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요. 감자적본부와 옹심이중국집 사이의 펜스가 아버지의 골칫거리이기도 합니다. 소집 근처에 다 와서 많이들 헤매는 이유이기도 하니까요. 그런 불편함을 덜어드리고, 좀 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올 수 있도록 강구한 간판이지만 너무 싫은 간판입니다. 그 간판을 보고 많이 오기도 하지만, 그저 '카페'를 기대하고 왔던 사람들에겐 적잖이 실망감을 안기는 장소거든요. 카페라고 하는데 앉을 곳도 마땅치 않고, 테이블도 없고, 메뉴도 고작 3가지라 단출하거든요. 아버지가 계신 날엔 그래도 음료 판매율이 높지만, 제가 있는 날은 한 잔도 못 팔 때가 많습니다. 다른 메뉴를 찾으실 때 저는 주변 카페로 안내해 드리기도 하니까요. 아버지가 아시면 몹시 화낼 일일 듯해서 이 글은 아버지가 보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그 간판이 '갤러리'를 기대하고 온 사람들에게도 실망감을 주더라고요. 어느 작가님이 그러더라고요. 처음에 이곳을 찾았을 때 다 좋았는데 그 간판을 보고 조금 실망했다고요. 소집과 너무 안 어울리는 간판이라서 좀 의아하기도 했다고요. 저의 이런 사연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의문점이 좀 풀렸다고 합니다.


소집 내부의 배치도 아버지와 옥신각신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자꾸 무언가를 채워 놓고 싶어 하는 아버지와 달리 저는 심플한 것을 좋아해서 가급적 무언가를 두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정리를 잘 못하는 성격이라 무언가를 둬서 먼지가 폴폴 쌓이는 것보다 차라리 없는 게 낫더라고요. 소집에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 코너에 있는 소집 여물통과 멍에, 코뚜레, 털긁개, 소 사진의 배치는 아버지가 구상한 것입니다. 여기가 '소가 살았던 집'이라는 걸 직관적으로 보여주고 싶으셨던 거죠. 저는 이미 이름으로 충분히 이곳을 표현했다고 여기지만, 아버지는 아니셨어요. 혹여 전시 작품에 방해가 될까 싶어서 무언가를 두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이건 아버지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습니다. 처음엔 개인적으로 싫었지만, 처음 오는 분들에겐 '소집'을 각인시키는 곳이 되어서 이제는 소집 오브제 공간으로 없어서는 안 될 공간이 되었습니다.


60대 아버지와 30대 딸의 취향이 고루고루 묻어 있는 장소이다 보니, 소집은 찾아오는 분들의 연령대도 딱 한 연령대로 규정지을 수 없는 곳입니다. 한 타깃에 집중하는 것이 운영을 할 땐 좋을 수 있지만, 저는 폭넓게 만나는 것이 아직은 더 좋더라고요. 서로 근무일을 나누어 일을 하다 보니, 서로의 취향을 존중해 주는 분위기도 자연스레 형성이 되더라고요.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저는 저대로 관람객을 맞이하는 방식도 다릅니다. 아버지가 있는 날과 제가 있는 날의 온도 차가 큽니다. 그건 아버지가 있는 날과 제가 있는 날을 고루고루 찾아주신 분들이 여실히 느낍니다. 인사를 나누고 작품에 대해 최소한의 설명을 하고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물어봐달라고 하는 저와는 달리, 아버지는 보다 적극적으로 소집을 소개하고, 전시를 안내하고, 사진도 찍어주곤 합니다. 그래서인지 소집의 후기는 대부분 아버지가 계신 날에 다녀간 분들의 후기입니다. 처음엔 아버지의 투박한 말투에 당혹스러워하다가 그 속에 배인 잔정에 사람들은 소집을 더 오래 기억하더라고요. 아버지 소집지기만의 무기가 된 거죠. 제가 지키는 날에도 아버지를 찾는 분들이 더 많아지고 있다는 걸 느낄 때마다 아버지가 얼마나 이곳에서 애쓰고 있는 지를 생각합니다. 요즘은 제가 외부 일정이 더욱 잦아져서 아버지가 지키는 날이 부쩍 더 늘어나기도 했는데요. 움직여야 에너지를 얻는 아버지가 얼마나 답답하실까 싶기도 합니다. 아버지와는 여전히 옥신각신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도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아버지가 왜 그런 말씀을 하는지 이해가 된다는 점입니다. 그전엔 제 마음을 먼저 헤아려달라는 욕심만 컸고, 아버지를 헤아릴 마음의 여유도 없었어요. 같이 일을 한 7년의 시간이 꽤나 크게 자리를 잡고 있구나 느낍니다. 결국은 함께한 덕분에 지금까지 걸어올 수 있었다고 여실히 느낍니다.


소집에 온 가족 여행객 분들 중에 부모님과 성인 자녀분이 온 경우 좀 더 유심히 보게 되는 게 있어요. 그분들 역시 그냥 온 게 아니라, 아버지와 저의 이야기를 어딘가에서 보거나 듣고 오셨더라고요. '아버지와 딸이 같이 갤러리를 한다고?' 궁금증을 갖고 오는 거죠. 부모님을 모시고 온 자녀분도 있었고, 자녀들을 데리고 온 부모님도 있는데요. 자녀들을 데리고 온 부모님은 내심 자녀분과 이런 공간을 함께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내비치기도 합니다. '우리도 이런 거 같이 해볼까?' 농담반 진담반으로 건네는 이야기를 종종 듣기도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아버지와 제가 함께 이렇게 일을 함께하는 게 정말 큰 행운이구나 느끼기도 합니다.


제 성격상 '아버지와 같이 일을 해야겠다'는 계획은 절대 못 세웠을 거예요. 어쩌다 함께 시작한 여행이 책으로 묶이고, 그 책은 또 다른 일을 함께 하게 하고, 그러면서 공간을 함께 꾸려가는 일까지 이어지게 된 겁니다. 한편으론 스물다섯에 결혼해서 청춘을 다 누리지 못한 채로 산 아버지의 원을 지금 함께 풀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저도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를 호되게 겪고 난 후 조금은 홀가분해졌습니다. 소집을 하면서 돈은 크게 벌지 못하지만, 온전히 제 시간을 번 덕분에 훨씬 더 큰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경험을 하는 하루하루이기도 합니다. 이 시간도 영원하지 않겠죠. 그래서 더없이 소중한 지금입니다. 먼 훗날, 인생을 돌아볼 때 가장 그리워하는 것도, 가장 잊지 못하는 것도 아버지와 함께한 소집에서의 시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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