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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섭 Jun 27. 2020

아이큐 54인 아이가 사회의 중심일까?

눈으로 보이지 않는 장애인의 세상

시각장애인에게 모나리자의 표정을 설명해 달라고 한다면?

청각장애인에게 슈베르트의 송어의 울림이 어떤지 물어본다면?


몇 주 전 초 2 아이가 받아쓰기를 보고 와서는 학교에서 울었다고 했다. 학교에 전화 걸어 여쭤봤다. 다른 아이들은 다 맞았는 데 민준이는 다 틀려서 다시 한번씩 쓰라고 했는데, 아마 창피해서 운 것 같다고 했다. 담임이 자리에 없었고 대신 도움반 보조 선생님이 지도했다고 학교에서는 설명했다.


어제는 아이가 자기 전 “오늘 보조 선생님한테 혼났어. 미술 하는데 쓸데없이 책가방 뒤적거린다고 혼났다.” 난 또 학교에 전활 걸어 사실 관계를 확인했다. 역시 보조 선생님이 미술 시간에 민준이가 집중을 못하고 책가방을 뒤적거려 역정을 냈다고 했다.


누가 보면 왜 별 것도 아닌 일에 유난을 떠나 할 것이다. 난 담임 선생님께 아이에 대해 학기 초에 드린 설명을 다시 했다.


“ 아이큐가 54이고 ADHD 인 아이입니다. 공부는 별도로 치료실을 다니고 있습니다. 수업에 방해만 안된다면 학교에 가서 또래 아이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보고 오는 것만으로도 저는 만족합니다.”


학교 입학과 동시에 학생, 학부모, 선생님 등 모두에게 아이의 장애를 공개하고 복용하는 약에 대한 설명도 했고 그래서 아인 도움반에서 수업받고 일반반에서는 보조 선생님이 수업을 가끔 도와주시기로 했었다.


아이도 받아쓰길  보고 싶어 한다. 오늘도 다른 친구들은 받아쓰길  맞았는데 자신만   맞았다고 했다. 아이도 친구들처럼 미술을 멋지게 끝내길 바란다. 누구보다. 그러나 나와  아내의 DNA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가끔 누나가 “넌 왜 그렇게 멍청하냐”라고 놀리면 아인 “나도 똑똑하고 싶은데 태어나길 이렇게 태어났단 말이야”라며 울부짖듯 누나에게 대든다.


눈에 보이는 장애에 대해 사람들은 이해가 쉬워 잘 배려한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은 장애애 대해서는 이해를 못 하기에 2차 문제가 생기기 쉽다. 바로 위에서 언급한 정서적 고통이다. 발달 장애아이들은 뇌에 장애가 있는 것이지 사랑 주머니에 장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받은 무시와 차별, 놀림은 고스란히 아이 머릿속에 쌓여가고 언젠가 그것이 사회로 되돌아간다.


물리 법칙에 에너지 보존 법칙이 있다. 롤러코스터의 에너지는 위치에너지에서 운동에너지로 그리고 보이지 않는 열 에너지로 바뀌어 가는 것이지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에게 받은 차별과 멸시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이 받은 정서적 고통은 고스란히 가족에게까지 전해져 죽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한다.


어느 분의 말씀처럼 아픈 부분이 나의 중심이고, 아픈 아들이 우리 가족의 중심이긴 하지만 사회의 중심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아직도 장애인 전용 주차칸을 못마땅해하는 분들이 많지 않은가?


학교는 우리 아이가 비장애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있는 유일한 곳이다. 중심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똑같은 잣대가 아니라 평등한 잣대로 아이를 대하길 바란다.


신은 생명을 평등하게 만들었어요. 능력과 환경이 같아서 평등한  아니야.  다르고 유일하다는  평등이지요.


햇빛만 받아 울창한 나무든 그늘 속에서 야윈 나무든   몫의 임무가 있는 유일한 생명이에요.  유니크함이 놀라운 평등이지요.  하나. 살아있는 것은 공평하게  죽잖아."


돌아가신 이어령 선생님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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