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비가 제법 소리를 내며 내린다. 여긴 통영, 미국에서 먼길을 날아 어째 어째 대한민국 남단까지 내려왔다.
숙소 창으로 보이는 통영의 모습이 다채롭다. 한려수도의 섬들은 구름을 머리에 이고 먼 바다를 따라 떠있고 뒤로는 삼도 수군통제영 세병관이 바다를 지켜보며 자리 잡고 있다. 강구안에는 밤낚시의 노동에서 돌아온 배들이 빗속에 휴식을 취한다. 가파른 언덕으로 다닥다닥 서로 껴안은 집들, 흐린 날 더 선명한 원색의 지붕들,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태평탕 여관의 굴뚝, 이 모든 것이 낯선 방문자를 편안히 맞이한다.
미국에서 살아온 22년간의 시간이 망망한 바다에 흩어져 있는 저 섬과 닮아 보인다. 가족과 친구, 따뜻하고 친근한 것들에서 떠나 낯선 정글을 헤쳐왔던 지난 삶이 비안개에 싸인 섬이 되어 나타났다 사라진다. 저 다도해의 섬들처럼 각자의 섬에 갇혀 살아가는 게 우리네 모습일 터이다.
한 척의 배가 유유히 바다로 나아간다. 저 섬 모퉁이를 돌면 430년 전 한산대첩 당시 격전지를 지날 것이다. 바다는 화살과 불, 함성과 비명이 난무하던 그때 기억을 품고도 평온하다. 큰 일을 겪고 나면 오히려 세상일에 담담해지는겐지 저 바다도 물결의 일렁임조차 없이 담담하다.
망루 역할을 했다는 동포루와 서포루가 양쪽 언덕 높이 자리해 있다. 적군의 침입을 밤낮으로 살피던 저곳이 지금은 관광지로 변모했으니 태평성대를 말하는 것인가.
고깃배들이 다시 닻을 올리고 장터엔 가게문 여는 소리가 분주하고 직장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의 일상이 바쁘다. 전쟁 중인 이웃나라나 격전이 치러지던 과거의 사람들에겐 사무치게 그리울 이 일상이 이 아침 소중히 다가온다.
요란하지도 유별나지도 않은 모습으로 먼 시간을 날아온 객을 맞이하는 통영, 그 아침을 봄비가 적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