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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다희 Oct 01. 2024

아, 내가 시킨 커피가 디카페인이 아니었던가

어느 날인가부터 카페인이 어려워졌다.


커피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몇 잔을, 언제 들이켜도 괜찮은 날들이 있었는데.


하지만 이젠 아침 일찍 일어나 마신 커피 한 잔에도 밤 중에 잠을 전혀 이룰 수가 없다.


괴로운지고...


그럼에 나는 커피를 포기하지 못한다.


커피는 잠을 깨기 위해 마시는 단순한 음료 이상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도무지 버틸 수 없을 것만 같은 버거운 하루도 커피 한 잔을 내리는 매일의 습관으로 시작하고 또 살아낼 수가 있다.


힘든 날일 수록 커피를 내리고, 커피가 내려지는 시간에 숨을 고른다.


예열되지 않은 오븐에서 완벽한 요리가 나올 수 없는 것처럼, 아마 나의 하루에도 짧게나마 커피를 내리는 만큼의 예열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르지.


어찌됐건 말똥한 정신으로 온 밤을 지새는 일은 생각보다 괴로운 일이므로, 요즘은 디-카페인 커피를 마시곤 했다.


좋아하는 것을 계속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달까.



오늘은 입회가 있어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늘 예정된 시간보다 넉넉히 도착하는 편이기에 오늘도 일정을 시작하기 전 커피 한 잔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주문을 하고 자리에 앉아 유리잔 옆에 놓인 영수증을 무심코 확인하다가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내가 시킨 아메리카노가 디카페인이 아니었던가.


마음이 향하는 곳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아무래도 속일 수가 없나보다.


어찌됐건 잠들지 못할 오늘 밤을 아침부터 걱정하여 달라질 것은 없었으므로, 그냥 시원하게 커피를 들이키기로 했다.


커피 한 잔을 주문하는 일조차 내 마음 같지는 않았지만 이것도 그리 나쁘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마시고 싶었던 커피를 온전히 한 잔 마주하며, 오늘 하루를 잘 요리할 수 있는 넉넉한 온기를 얻었으니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많은 것들에 여유로워 지고 더 괜찮은 사람이 될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그게 참 마음처럼 쉽지가 않다.


계획처럼 되지 않는 일들, 마음같지 않은 내 모습들로 여전히 힘들고 버거운 날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계획처럼 되지는 않아도, 마음같지는 않아도,


그 속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썩 괜찮은 것들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 내가 시킨 것이 디카페인이 아니라 더 좋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오늘 아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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