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부하 이후의 느린 재가동
계절이 넘어갈 때마다 내 마음도 길을 잃는다.
읽던 문장은 갑자기 기울고 단어는 빛처럼 흩어진다.
책을 펼치면 활자는 얼룩이 되고 상형문자 같은 조각들이 어른거렸다.
지난 나흘 동안 나는 책상 앞에서 돌처럼 굳어 있었다.
책을 읽었지만 머릿속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문장은 나를 밀어냈고 단어는 스쳐 지나갔다.
모든 문장이 먼 곳에 가 있었다.
글쓰기도 닫혀 있었다.
생각은 칡뿌리처럼 서로를 조여 들어갔고
단어는 저 멀리 별처럼 꺼져 있었다.
‘시간은 흐른다’를 쓰려다
계속 ‘시간은 갈라진다’고 적는 내 손을 보며
나는 잠시 멈추기로 했다.
더듬으며 읽을 때 이해도는 더 엉망이었다.
‘윤택하다’를 ‘유하다’로 받아들이는 나를 보고
내 안쪽에서 작은 금이 가는 느낌이 들었다.
빛이 닿지 않는 방처럼 조용히 읽고 쓰는 일을 내려놓았다.
나는 어릴 때 활자중독이었다.
군 입대 직후 신병훈련소에서 읽을거리가
포켓 성경만 남았을 때, 눅눅한 내부반 공기 속에서 내 안은 텅 비어 울렸다.
편지로 여동생에게 단편소설을 프린트해 보내달라 했고
그 두툼한 편지봉투가 중대장실에서 찢기던 소리를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한다.
가끔 나는 오래된 CPU 같다고 느낀다.
열이 차오르고 냉각이 되지 않아
서서히 느려지다
어느 순간 전원이 툭 내려가는 것처럼.
읽고 쓰기가 멈추는 것도
내 나름의 최적화일지 모른다.
휴가나 연휴가 오면 며칠씩 잠만 잘 때가 있다.
물도 제대로 마시지 않은 채
침대의 음영 속으로 가라앉는다.
겉은 무던해 보이지만 나는 생각보다 예민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잠이 나를 데리고 가는 날이 많아서다.
잠이 막히면 폭식과 폭음, 줄담배가 찾아온다.
그 모든 것을 멈추면 또 다른 곳에 금이 간다.
난독과 과다 수면이 그 빈자리를 서늘하게 채운다.
나는 고장 난 것이 아니다.
다르게 작동하는 것뿐이다.
직선으로 움직이지 않는 선처럼 불연속의 궤도를 따라가는 것뿐이다.
곰곰이 돌아보면 나는 애초에 직선으로 살아본 적이 없다.
다시 생각해 보니 아무도 직선으로만 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