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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향기 Mar 23. 2022

손목이 나가도 무쇠팬이 좋은 이유

 호주에 살면서 가장 좋은 건 훼손되지 않은, 사람 손이 가지 않은 투박한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가만히 두어도 아름다운 자연에 감히 인간의 손을 대지 않은, 인간의 겸손함이 묻어나는 자연을 여기서는 즐길 수 있다.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자연이 좋아 나는 친환경적인 사람이 되었다. 자신의 모습을 힘써 지키고 있는 자연을 내가 감히 망치고 싶지 않았다.

 친환경적 생활 습관은 부엌 살림에도 영향을 미쳤다. 어느 순간 테팔을 쓰지 않기로 하고 모든 조리 도구를 바꾸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투박하지만 멋진 녀석을 만나게 되었다. 무쇠팬이다.


 무쇠팬이란 녀석은 상당히 무겁다. 아무리 작은 사이즈의 팬이라 해도 한 손으로 번쩍 들기엔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난 이 무거움이 너무 좋았다. 물론 팬을 한 손으로 현란하게 흔들며 불 맛을 입혀 음식을 볶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한 손으로 들 수 없는, 그 가볍지 않음이 맘에 들었다. 중심을 딱 잡고, 흔들리지 않는 군자의 모습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무쇠팬은 무게로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막 쓸 수 있는 녀석이다. 막 써야 길이 잘 나고, 막 굴려야 진가를 발휘한다. 막 부려먹어도 되는 돌쇠가 우리 집 부엌을 맡아주고 있는 느낌이라 마음이 푸근하다. 긁혀도 다시 기름 칠만 잘해 주면 반들반들 윤이 나고, 혹여 녹이 슬어도, 녹을 벗기고 다시 기름 칠 해 주면 새것처럼 돌아온다. 막 써도 부담 없고 상처가 나도 쉬 메워지는, 회복 탄력성이 매우 높은 녀석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무쇠의 가장 큰 매력은 내 부족한 손맛을 채워준다는 것이다. 똑같은 달걀 프라이를 해도, 무쇠에 올린 달걀 프라이는 맛이 다르다. 무쇠에만 올리면 모든 음식이 본연의 맛을 최대치로 끌어당겨 기막힌 음식으로 탄생되는 신기한 일이 일어난다. 그래서 무쇠팬에 스테이크를 구우면 육즙은 꽉 잡혀 있고, 고기의 풍미는 최고 지점에 올라간 기막힌 스테이크가 된다. 딱히 요리 솜씨가 좋지 않아도 본연의 재료로 기막힌 맛을 낼 수 있도록 해 주는 무쇠팬은 내 주방 보물 1호이다.


 무쇠팬이 내 주방 보물 1호가 되기까지는 인고의 시간이 필요했다. 무쇠를 테팔처럼 썼다가는 낭패가 나기 때문이다. 테팔은 불도 안 켜고 재료를 넣어도 빙글빙글 그 위에서 미끄러져 놀지만, 무쇠에서 음식들이 그렇게 빙글빙글 미끄러지기 위해서는 길들이기 과정을 착실히 거쳐야 한다. 돌쇠 같은 군자를 대하듯, 무심한 듯 신경 써서 다루어야 무쇠팬을 제대로 쓸 수 있다. 예열도 충분히 해야 하고, 시즈닝이 여러 겹으로 잘 되어 있어야 그 위에서 음식들이 빙글빙글 춤을 춘다. 내가 들인 노력만큼, 내가 보인 참을성만큼, 딱 그만큼의 음식이 무쇠팬에서 만들어진다.


 나처럼 철분이 부족해서 헬렐레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쇠팬이 일석이조의 조리 기구다. 무쇠팬에 요리만 해도 조리 과정에서 철분 이온이 나와서 자연스럽게 철분 섭취가 이루어지니,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인 주방 도구가 아닌가?


내게 무쇠팬은 음식을 만드는 조리 도구 이상이다. 자신의 일부를 나눠주기도 하고, 자신을 벗겨내서 새로운 옷을 입고 다시 태어나기도 하고, 막 굴려서 사용해도 늘 그대로인 모습이며, 가볍게 변심하지 않고, 무겁게 자리를 지키는 매력 덩어리다. 몇십 년은 내 곁을 지켜줄 수 있는 녀석이라 정을 주게 되고 그만큼 믿음을 줄 수 있다.


사람도 무쇠팬 같다면 정말 멋있을 것 같다. 내 할 일을 하면서도 다른 이에게 아낌없이 나눠주는 넉넉한 사람. 내가 뜨거울지언정 내 위에서 모두를 춤추게 하는 사람. 언제든 다시 일어 서고,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사람. 흠이 나도 다시 흠을 메우고 한결 같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 오랜 시간을 누군가의 옆에서 묵묵히 지켜줄 수 있는 사람. 군자 같으면서도 돌쇠가 되어주는 그런 사람 말이다.


부엌 가스렌지 위에 놓인 무쇠팬이 오늘따라 더 윤이 난다.


오늘의 희열 카드 —반짝반짝 무쇠팬 카드



<나의 무쇠팬, 사진: 나무향기>


<처음사진출처: theguardian.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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