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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담 Apr 18. 2022

전화받으며 뛰어도 4마일 최고기록?

뉴욕마라톤으로 가는길 <세번째 대회> RUN AS ONE 4마일

뉴욕시티 마라톤 참가권을 얻기 위해 9번의 대회참여와 1번의 자원봉사를 수행하는 9+1 챌린지. 세번째 대회로 참여한 RUN AS ONE 4마일 대회 참여후기입니다.


대회요약

개최일: 2022년 4월 3일, 오전 8시 30분

개최장소: 맨하탄 센트럴 파크

특이사항 : 대회날 춥고 비가 왔음



올해 이 9+1 챌린지를 시작하고 세번째 대회를 뛰었다. 그리고 세 대회 모두 날씨의 축복을 받지 못했다. 1월 대회는 너무 추웠고, 2월 대회는 따뜻하다가 갑자기 그날 추웠고, 세번째 대회는 쌀쌀한데 비까지 왔다. 사실 달리는 동안에는 다행히도 비가 내리지 않았지만. 대회 하루전날에 일기예보를 보니 경기가 시작되는 8시 30분 시점에 강수확률이 80%였다. 미국은 이 시간별 일기예보가 굉장히 잘 맞는 편이라서 이정도면 거의 확실히 비가 온다고 봐야한다. 날도 추운데 비까지 온다고 하니 이정도면 안 뛰는게 맞는 날씨지만 참가접수를 했으니 영 뒤가 개운치가 않다. 접수비가 아까운것도 사실이지만, 접수를 해놓고 달리지 않았다는 전적이 생기는게 두려웠다. 물론 그런 전적이 있다고 해서 9+1 챌린지에 불이익을 주는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요즘은 코로나 시국이기도 해서 조금이라도 열이 있거나 아프면 학교든 직장이든 뭐든 자진해서 결석하는것을 두손 들고 환영하면 했지 불이익이나 눈치는 주지 않는다. 다만 접수를 해놓고 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나 자신이 알게되는것이 두려웠다. 그러면 앞으로도 추워서, 더워서, 비와서, 피곤해서 안 가는 대회가 줄줄이 생겨날것만 같았다. 



혹시라도 기상이변이 생기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대회날 아침에 일어나 하늘을 보니 정말이지 8시 30분에 비가 딱 오게 생겼다. 7시나 8시도 아니고 딱 8시 30분에 올 모양새였다. 갈땐 지하철을 타고 올땐 택시를 타고 빨리 와야지 하는 마음으로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었다. 콜드기어 컴프레션 모크티(대체 이걸 언제까지 입어야 하는지... 뉴욕은 겨울이 길어서 일년에 반정도는 이걸 입는것 같다)에 런클럽 유니폼(반팔티)를 겹쳐입고 바지는 긴바지 레깅스를 입었다. 기온이 영하는 아니라서 바지는 콜드기어가 아닌 일반 레깅스를 입었다. 




1월에 여기서 열렸던 10km대회는 동편 102번가 부근에서 시작해서 한바퀴를 뛰는 코스였는데, 이번 대회는 4마일(약6.4km)이기 때문에 위아래를 조금씩 잘라내고 달린다. 시작지점도 10K 대회와 다르게 남쪽 68번가 부근에서 시작한다. 출발위치가 처음보는곳이라 또 약간 긴장했지만 지하철에서 내리니 런닝화를 신은 사람들이 우루루 한곳을 향해 가고 있었고 나도 그 틈에 끼어 에너지 젤리를 우물대며 걷다보니 어느새 출발점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H그룹에서 출발하게 되었다. NYRR은 자기네가 주최하는 대회의 참가 기록을 바탕으로 출발그룹을 배정해주기 때문에 출발그룹으로 그 사람의 속도를 어느정도 알 수 있다. 2월에 너무 힘들어 한국어로 욕까지 내뱉어가며 막판 스퍼트를 올린 보람이 있게도, J그룹에서 H그룹으로 승격되었다. 한결 뿌듯한 마음과 넓게 편 어깨로 H그룹에서 출발 신호를 기다렸다. 

하지만 H그룹만 해도 꽤 뒷편이기 때문에 출발 총성이 울린 후 10분은 지나야 내가 출발선에 설 수 있다. 대회날은 주변에 사람이 많기 때문에 시계의 GPS를 미리 연결시켜둬야하는데, 나처럼 뒷그룹에서 출발을 하다보면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이 GPS가 제멋대로 연결을 풀어버리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한다. 이날 대회는 참가 규모가 꽤 큰 대회라서 13분정도 지난 후에 출발 기록판을 밟고 뛰어나갔다. 


이래서 여러가지 코스를 많이 뛰어봐야 한다는 말이 있는것 같다. 초행길은 더 멀게 느껴지듯이 달리기를 할때도 처음 달리는 코스는 실제보다 길게 느껴지고 힘들다. 1월에 10K코스를 한번 뛰어봤다고 제법 익숙하고 거리감도 나쁘지 않다. 게다가 가장 험악한 언덕이 있는 북쪽면이 아예 코스에서 제외되어서 기분은 실제보다 더 짧은 거리를 달리는 것 같았다. 날씨는 당장이라도 빗방울이 떨어질것 같았지만 비가 오진 않았다 (!!) 언덕이 많은 센트럴파크를 오르락 내리락 뛰면서 1km에 한번씩 찍히는 내 속도를 보며 '어머 웬일! 다음 대회엔 C그룹 정도 가는거 아녀?' 하는 기대를 가져볼만큼 놀라운 속도로 달렸다. 4km를 지나면서 조금 힘이 빠지긴 했지만 주변에서 뛰고 있는 사람들의 속도에 나도 모르게 말리는것이 또 대회의 매력. 힘들어도 곧 끝난다는 생각으로 계속 달리고 있는데....



전화가 와...? 대회 뛰고 있는데


생전 나 찾는 사람도 없고 전화 올 일도 없는데 일요일 아침 9시에 무슨 전화가 와 싶게 전화가 온다. 워치를 흘끗 보니 모르는 번호다. 주말 아침 혼자 운동할때도 전화는 안 받을텐데 대회를 뛰는 와중에 말이나 되는 일이냐며 가볍게 무시하고 계속 뛰고있는데 다시 한번 전화가 온다. 스팸전화도 한번만 오고 마는게 인지상정이거늘, 아니 무슨 전화가 두번이나...? 이정도면 긴급 연락이 아닌가? 달리는 자의 사고(思考)는 자기 다리의 속도만큼 빨라지는거라서, 빨리 달릴때는 머리도 휙휙 더 빠르게 돌아간다. 그리고 평소의 성격대로 비관적인 방향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달려간다. 혹시 애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 남편이 쓰레기 버리러 잠시 나왔다가 문이 잠겨서 못 들어갔다거나?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한테 전화를 빌려서 걸었다거나??? (실제로 이런 일이 나에게 있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갑자기 불안해져서 벨트에서 전화기를 꺼내 황급히 그번호로 되걸기를 한다. 물론 달리는 발을 멈출수는 없었지만 속도가 떨어지는건 당연한 일이었다. 신호가 가고 통화가 연결되었다. 상대방이 "여보세요" 라고 한다. 그래! 영어로 받는것도 아니고 "여보세요"라고 하는데, 잘 들리진 않아도 낮은 남자 목소리가 내 남편이 틀림없다. "왜? 무슨일이야? 무슨 일 있어?" 라고 놀라며 황급히 묻는 내 말에 빨리 대답을 안하니 이거야말로 큰일이 났구나 싶어서, 그 짧은 와중에 또 왜 하필 나는 이런 날에 비도 온다고 했는데 굳이 달리기를 하러 여기까지 왔는가. 애가 다쳤나? 집안에 갇혔나? 별별 비관적인 생각이 들면서 "여보세요"만 하고 말이 없는 그자를 향해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한다. "왜 말을 안해! 빨리 말하라고!! 왜 전화했냐고!!!" 5km를 개인 최고 기록으로 오르막 내리막 달려온자는 안그래도 숨이차는데 애까지 타니 말이 보통 거친게 아니다. 냅따 화를 내고있으니 전화가 툭 끊긴다. 뭐지? 이정도면 혹시 납치당한건가? 집안에 강도라도 들었나? 이 아침부터 애를 데리고 어디 나갔다가 테러를 당한건 아니겠지? 뉴욕에서 10년이나 살았는데도 아직도 미국이라고 하면 CSI같은 드라마 밖에 생각이 없는 나는 한껏 비관적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그리고 문자가 들어왔다.




저 최OO입니다. 다 뛰셨어요?



최OO이 누구야! 문자가 아니고 전화였으면 냅따 또 화를 낼 시점인데, 여전히 다리는 뛰고있고 생각도 빠르게 돌아가는지라 금새 생각이 났다. 이분은 우리 동네 언니 남편이다! 이 대회 뛰신다더니 오셨구나!


우리집에서 딱 2블럭 떨어진곳에 사시는, 나에게 지구상에서 거리상 가장 가까운 이웃. 그리고 종종 커피와 라면의 은혜를 베푸시는 언니의 남편분. 그리고 여느 '동네친구의 남편'이 그러하듯 내겐 썩 편안한 사람은 아닌데, 왜들 그렇잖은가. 동네 친구 집에 삼삼오오 모여 커피도 마시고 과자도 먹고 모처럼 육아와 살림에서 해방되어 이런 벌건 대낮에 우리가 이렇게 한가해도 되나 싶은 달콤한 수다타임을 갖고있는데 갑자기 "어머! 우리 남편 지금 온대!!" 하면 순식간에 그 여고시절 "야! 학주 떴어"처럼 일사분란하게 치우고 뿔뿔히 흩어져야 하는 그런 상황. 아니 우리가 모여서 과자먹고 커피마신게 뭐 그렇게 질펀하게 논것도 아닌데 왜 죄지은 사람처럼 그래야하는지는 몰라도, 어쨌거나 "남의집 남편"은 어려운 상대인데 거기다 대고 내 남편한테 하듯이 화를 버럭버럭 내다니.....


옛날에 그런 뉴스가 있었다던데 우스갯소리로 만들어낸것인지 진짜로 뉴스에 나온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어느 집에 밤늦게 강도가 들었는데 주부가 강도를 때려잡은 것이다. 어떻게 강도를 맨손으로 잡으셨나요? 라고 묻는 기자에게 주부의 대답 "남편인줄 알고..." 




어떻게 동네 언니 남편에게 욕을 했나요?
제 남편인줄 알고...


일전에 공원에서 우연히 만나 달리기를 같이 해본적이 있어서 내 페이스를 정확히 알고계셨는데, 문제는 그분은 B그룹에서 출발하는 빠른발이라 H 그룹이 얼마나 늦게 출발하는지를 전혀 짐작도 못 하셨던 것.

그래서 그분은 이정도 시간이면 완주했겠지 하고 전화를 하셨는데 저는 출발하는데 10분 이상 걸리니 그것도 더해주셨어야죠 ㅠㅠ 


어쨌거나 문자로 "골인지점 들어오면 연락해라. 비도 오고. 차 가져왔으니 집에갈때 태워주겠다"는 메세지를 받고 다시 앞을 보고 달려본다. 전화로 화를 내느라 호흡이 흐트러지고 기운이 많이 빠진데다가 음성인식으로 하긴 했지만 문자에 답도 하고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그리고 정말 비도 오기 시작했다. 오늘 4km 지점까진 개인 최고기록이었는데 끝에서 망했네 하며 적당히 뛰고 마무리 하려는데 시계를 흘끗 보니....?




아직 해볼만한데....?


이번에도 마지막 몇백미터를 조금만 쥐어짜면 기록 갱신을 넘볼 수 있을것 같았다. 이쯤에서 지난번에 효과를 톡톡히 본 한국말로 욕하며 기합넣기를 시전해야 하나 싶었지만, 골인지점에서 기다리겠다는 '동네 언니 남편'이 내가 욕하는 소리까지 들으시면 날 뭐라고 생각하시겠어... 이제 걔랑 놀지 말라고 하시면 안되니까 일단 입은 다물고 끅끅거리는 괴성을 뱃속으로 밀어넣으며 피니쉬라인 기록판을 밟았다. 


목에서 피맛이 느껴질 정도로 힘들었고 물도 마시고싶었다. 예전엔 달리기 대회를 가면 생수병으로 물을 줬는데 요즘은 환경문제 때문인지 커다란 물통에서 자원봉사자들이 물을 퍼서 종이컵으로 준다. 물 주는 테이블을 따라 걸어가며 한잔 받아 마시고, 또 한잔 받아마시고, 세잔쯤 연거푸 마시니 좀 살 것 같다. 다시 전화를 걸어 이번엔 화내지 않고 얌전히 서로의 위치를 묻고 극적으로 상봉한다. 어색하고 어려웠던 사이는 대회 도중에 전화를 걸어 미안하다고 연신 사과하는 분과, 소리지르고 화내서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내 기록이 떨어지면 참지 않을거라는 우스갯소리로 한결 화기애애해졌다. 이로써 나는 앞으로 언니네 집에서 커피를 마시며 놀다가 "어머 우리 남편 지금 온대!" 하는 상황이 되어도 성급히 일어나지 않고 "아휴 그날 전화만 안하셨어도~ 제가 달리기 기록이 1분은 단축되었을텐데요~~~" 하는 너스레를 떨며 인사라도 한번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매일 똑같은 거리를 뛰고 또 뛰고, 배구나 축구처럼 팀메이트가 있는것도 아니고 테니스처럼 승부가 있는것도 아닌 달리기를 뭐가 재미있어서 하느냐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그에 대한 대답은 여전히 나도 한마디로 간결하게 설명 할 수 없지만, 이런 재미있는 일도 생기고, 맨손으로 한밤중에 강도를 때려잡은 어느 주부처럼 남의집 남편에게 호통도 치고 이야깃거리도 만들고... 이런 재미에 달리고 또 달린다. 앞으로 6번의 경기, 그리고 1번의 자원봉사를 채우면 2023년 뉴욕마라톤 참가 확정자가 된다. 42.195km를 완주하는 한걸음 한걸음이 소중하겠지만, 출발선을 향해 하는 이 걸음 걸음도 너무나 재미있고 소중하다. 나에게는.




뉴욕에 10년, 그 중 브루클린에서 5년을 살았는데 차 타고 이 다리를 건너본게 이날 두번째였다. 사주신 커피를 홀짝이며 비내리는 브루클린 브릿지를 건너는 낭만이라니! 



그리고 기록은 지난번 4마일 대회를 무려 50초나 단축해서 35분 6초. 4마일 개인 최고 기록이 나왔다. 그리고 이날 2마일 기록이 17분이었는데 내 나이에 2마일을 17분에 달리면 미국 육군 체력검정에서 달리기 종목 만점이다. 너무 뿌듯해서 친구에게 자랑을 하니 입대하는거냐며 크게 놀란다. 아니 내가 입대를 한건 아니지만... 하여간 이런게 러너에게는 큰 자랑이고 기쁨이라니까 왜 그걸 몰라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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