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이 머문 자리
한때 물 위를 떠돌던 병이 계단 위에 놓여 있다.
물살에 떠밀리던 흔적은 사라지고, 이제는 단단한 계단 위에서 멈췄다.
떠다니던 것이 멈추면 더 이상 부유하는 존재가 아니다.
흐름을 잃었지만, 새로운 자리를 찾았다.
그 자리에서 다시 이야기가 시작된다.
부유와 정착, 떠돎과 머묾은 늘 맞닿아 있다.
끊임없이 흘러가던 것들은 결국 멈춘다.
물살 위에서 흔들리던 병은 이제 고요한 계단 위에서 흔적이 된다. 우리의 삶도 그러하다.
익숙한 곳에서 낯선 곳으로, 다시 익숙해진 자리에서 또 다른 길로 나아간다.
흔적을 남기고, 떠난 자리에는 기억이 쌓인다. 우리는 머무르고, 다시 떠난다.
그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흐릿해질 뿐,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는다.
우리를 움직이는 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흐른다.
떠밀려 도착한 자리에서 한동안 머물며 또 다른 형태의 삶을 만들어간다.
머무름은 단순한 정지가 아니라 쌓이는 과정이다.
시간이 쌓이고, 경험이 쌓이며, 감정이 쌓인다.
우리가 어디에 머물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기억은 공간에 스며든다.
머물렀던 곳, 함께했던 순간들, 주고받았던 감정들.
시간이 지나면 공간은 변하지만, 남겨진 기억들은 여전히 우리를 맞이한다.
같은 곳에 다시 서도 같은 사람이 아니다. 떠난 후에야 깨닫는 것들이 있다.
떠남과 머무름은 결국 같은 흐름 속에 있다.
그것은 우리를 만들고,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