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체인을 주문했다.
언젠가 친구 손에 들렸던 명품 브랜드이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겐 어울리지 않는 무언가였다.
어색한 무언가였다.
그러나 그즈음의 나이엔 꼭 그랬다.
공식이라도 있는 마냥 그랬다.
나는 3일간의 이벤트에 덜컥 가담한 셈이다.
그 시절을 떠올리며 말이다.
주문한 제품은 5만 원 남짓의 립 제품이었다.
나는 붉은색의 매듭이 엮어 있는 덤으로 얹어주는 키 체인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의 자금 사정으로서야 얼굴에 찍어 바르는 것도 포기한 셈이다.
그럼에도 가담하는 것을 자청한다.
글이 유명세를 얻지 못하는 까닭과 같은 이치다.
멈춰 선 자들의 지독한 매너리즘처럼 말이다.
아무래도 나이를 먹지 않을 모양이다.
나는 이해받지 못할 마이너스 통장처럼 잔여하는 관심이 쓸모없다고 여겨졌다.
혼자 나아가는 일이 그렇다.
포기한 순간에 멈춰버린 사람들이 그렇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해당 명품 브랜드는 한 달 여 전에 국내에 최초로 상륙했다.
나는 3일 간의 이벤트에 덜컥 가담한 셈이다.
분주한 사람들은 혀끌을 끌끌 거린다.
나는 멈춰버린 이들을 훔쳐보며 혀끌을 끌끌 거린다.
찾은 답이 무용해진 이들은 머릿수를 헤아린다.
머릿수만을 헤아릴 뿐이다.
갈증을 해결할 식음료만을 고집하며 말이다.
나아가고 있는 걸까?
타자기 소리에 맞춰 개가 짖기 시작한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경적 소리와 함께 몇 층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야유만이 살아남는다.
자그마한 슈퍼가 즐비한 한적한 2차선 도로에서 제한 속도가 없는 고속도로에서나 날 법한 소음이 들린다.
그러나 TV는 방음터널 위에 오른 청년들을 조명한다.
공감이 가지 않는다는 청년들이 늘어가고 있다.
문제만이 살아남는다.
그러나 사회는 해결하지 않는다.
기분이 나쁘면 해결되지 않는 사회에 접어든 것은 빌어먹을 전염병 때문인가?
기분 나쁜 소통이 사람을 분류한다.
문제만이 살아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