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이 저물어 갈 무렵이면 교실에는 새로운 당번이 하나 생긴다. 추운 겨울 교실을 따뜻하게 만들어 줄 난로를 설치하는 작업이 시작되고 당번으로 불려 가는 사람들은 연통과 난로를 자기 교실로 운반하는 일도 했다. 그렇게 귀찮은 수고를 거치고 나면 불을 피우지 않아도 교실은 왠지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듯 한 기분이다.
한 반에 55명이라는 숫자는 교실 뒤쪽 게시판 아래까지 테트리스 블록을 쌓듯이 채워 넣어야 가능한 숫자다. 콩나물시루를 연상케 하는 교실에는 어느새 자리싸움이 치열해진다. 난로를 중심으로 가장 가까운 자리는 뜨거운 열기로 수업 듣기가 힘들 정도가 되지만, 가장 먼 곳에 앉는 사람은 겨우내 추위에 떨어야 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 자리를 유배지라 명명하기도 했다.
난로가 설치되면 난로 주변에는 화재를 대비한 모래주머니가 쌓이고, 불이 꺼지지 않도록 태워줄 골탄을 매일 배급받듯이 받아와야 하는 수고가 있어야 했다. 난로를 피우는 것도 아무 때나 우리가 원할 때 피우지 못하고 선생님이 난로를 피워도 된다는 허락이 있을 때까지 빈 난로를 곁에 두고 기다렸다.
난로를 피워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지는 날 아침, 당번은 남보다 일찍 등교를 해서 말통을 들고 창고에 가서 석유를 받아온다. 골탄에 종이로 불을 붙이기 힘들기 때문에 조금씩 나눠 받은 석유를 골탄에 묻혀서 불을 붙인다. 톱밥을 압축해서 만든 골탄은 불이 붙고 나면 엄청난 열을 발산한다. 그래도 넓은 교실이 훈훈해지기 위해서는 1교시 수업은 끝이 난 후에라야 가능했다. 화력이 좋아도 오전 시간 동안 유배지는 추위에 떨어야 했다. 손이 시려 노트필기가 잘 안될 정도로 추웠다. 그럴 때면 난로 주변에 있는 친구들이 자리를 바꿔 앉기도 하는데 그것도 잠시고 다시 돌아가 앉아야 하는 자리는 여전히 춥기만 했다.
어느덧 2교시 수업이 끝나고 나면 이제는 교실에 훈기가 돌아 유배지에서도 나름 어깨를 펼 수 있는 시간이 된다.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려 퍼지기 무섭게 배고픈 친구들은 벌써 도시락을 꺼내 난로에 올려놓는다. 자식들의 따끈한 식사를 위해 도시락 바닥에는 김치를 깔고 그 위에 밥을 얹은 후 참기름 넉넉히 두르고 마지막에는 회심의 계란 프라이가 올려져 있다.
도시락이 하나 둘 난로 위를 차지하게 되면 순서를 잃은 도시락은 탑을 쌓듯이 위로 올라가게 된다. 도시락 탑이 쌓이게 되면 어느새 다시 수업이 시작되고 3교시 중반쯤 되어가면 맨 아래층에 놓인 도시락에서는 참기름 고소한 냄새는 어느 순간 탄내로 바뀌어 코를 자극한다. 난로 앞에 앉은 학생에게 선생님이 눈빛을 보내면 눈치 빠른 학생은 이미 집게를 들고 뜨거운 도시락을 내려 위에 있는 도시락부터 다시 탑을 쌓는다.
바닥에 내려진 도시락 주인은 선생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엎드려 도시락을 챙겨간다. 열심히 공부하는 척 교과서를 앞에 세워놓고 책상 아래에서 도시락을 두 손으로 쥐고 흔들어 댄다. 열심히 흔들린 도시락은 잘 비벼져 참기름 고소한 냄새가 물씬 풍겨져 나온다. 앞사람의 등짝을 방패 삼아 교과서로 도시락을 가린 채 선생님 몰래 눈치를 살피며 한 숟가락씩 입에 넣고 숨어서 되새김질하듯 씹어 삼킨다.
"아따, 이놈들아 3교시 전에 누가 도시락을 올려. 참기름 냄새 때문에 수업이 안되잖아."
선생님 호통에 양심 찔린 학생은 앞에 앉은 친구 등짝에 냉큼 엎드리고, 주면에 친구들은 그 모습에 키득키득 웃음이 한가득 배어 나온다.
"3교시 끝나고 도시락 올리면 위에 있는 도시락은 차가워서 못 먹어요."
"그래도 교실에 이렇게 냄새를 풍기면 너희들 수업이 잘 되겠냐?"
"저희들은 괜찮은데요."
"야, 창문가에 너." "빨리 창문 열어라. 냄새 때문에 머리 아파 죽겠다."
"안돼요. 추워서 수업 못해요."
"이놈들아, 머리 아픈 것보다 낫지 이 냄새 속에서 무슨 수업을 한다고 그래."
결국 선생님 성화에 창문이 열리고 교실은 이내 썰렁한 냉기가 휘젓고 지나간다. 창문 앞에 있는 친구는 금세 추위를 참지 못하고 살며시 일어나 조용히 창문을 밀어 닫는다. "끼~익~!" "와하하하..." 조용히 닫으려는 행동이 창문의 비명소리에 그만 교실은 웃음바다가 된다.
"**이 누가 창문 닫으래?"
"선생님 추워서 수업이 안돼요."
"그러게 누가 도시락 올려서 냄새를 피우래?"
"그거야 추우니까 따뜻한 밥 먹으려고 그러죠."
먹는 음식 앞에서는 한치의 양보도 없는 친구들이다. 결국 창문은 그대로 닫히고, 도시락을 까먹는 친구는 남이야 무슨 말을 하든지 말든지 엉거주춤 숙이고 열심히 밥을 먹는다. 결국 3교시가 끝나기도 전에 도시락은 텅텅 빈 도시락이 되고 말았다. 3교시가 끝나면 수업시간에 까먹은 도시락으로 이미 교실 안은 냄새가 진동을 하기에 배고픈 친구들은 10분간의 쉬는 시간에 하나 둘 도시락을 비워냈다.
4교시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면 친구들은 모두 자기 도시락을 찾아 점심을 먹기 시작한다. 수업시간과 쉬는 시간에 도시락을 까먹은 친구들은 먹을 게 없어 빈 숟가락 하나를 들고 하이에나처럼 여기저기 누비며 다른 친구들의 도시락에 눈독을 들인다. 일명 '한입만'이다. TV 프로그램에서 한입만이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은 아닐까? 빈 숟가락 들고 다니며 얻어먹는 밥도 생각보다 많은 것 같다.
친구들 도시락은 가지각색이다. 숟가락을 들고 다니는 하이에나 같은 친구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햄을 바닥에 깔아 가지고 오는 친구도 있고, 보온도시락에 반찬을 따로 싸가지고 와서 반찬을 무릎 사이에 놓고 먹는 친구도 있다. 어쨌든 하이에나들은 숟가락을 들고 종횡무진 친구들의 맛있는 반찬들을 공략했다. 한 숟가락이 모여 도시락 하나보다 많은 양의 밥이 되니 한 바퀴 돌아오면 배를 두드리며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김치에 참기름 한 방울 떨어뜨린 도시락 하나가 그 당시에는 왜 그리 맛있었는지 모르겠다. 먹어도 배고픈 사춘기 먹성이 시장이 반찬을 만드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도 가끔은 친구들 도시락 한 숟가락씩 얻어먹는 그 맛이 세상 어느 음식보다 맛있게 느껴졌던 것은 아마도 자신의 도시락을 기꺼이 허락하는 친구들의 따뜻한 마음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올해는 유난히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겨울이다. 떨어지는 기온이 차가워지는 만큼 내 사춘기 정다웠던 기억들이 깊어가고 있다. 그때 도시락 내어주던 친구들 그 정다운 손길들은 지금쯤 어디에서 누구와 정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을지 궁금해지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