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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수꾼 Aug 31. 2020

어느 날 보니 '투기꾼' 주부가 되어있었다.

[마음의 주체] 부동산 시장에 뛰어드는 주부의 마음

(40대 초반 여성의 시선으로 썼습니다.)


“당신이 그만큼 노력을 했다고 생각해? 충분할 정도로?”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치질까지 걸려가면서. 옆에서 봤잖아, 위로는 못해줄망정 왜 불난 집에 부채질이야?”

“아니, 업무시간에 일을 하는 게 무슨 노력이야. 그거야 당연히 월급에 대한 반대급부지. 그 외에 추가적인 노력을 했냐고.”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야 지금. 그냥 좀 들어주면 안 돼? 내가 당신한테 승진하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했어? 이런 일이 벌써 몇 번째잖아. 이제는 내가 면접 봐서 뽑은 애가 나랑 같은 직급이라고.”

“그래, 당신이 말한 것처럼 벌써 승진 누락이 여러 번 있었어. 그 기간 동안 당신은 어떤 노력을 했는데? 저녁에 회식자리에 제대로 참석을 했어, 아니면 상사 집안 대소사를 꼼꼼히 챙기길 했어. 명절에 인사 메시지를 보낸 적은 있긴 해? 그냥 업무시간에 업무한 것 밖에 없잖아. 당신처럼 회사생활하면서 승진할 수 있는 건 딱 과장까지야.”


‘나도 알아, 이 개자식아. 남의 편이라서 남편이라더니, 딱 너를 두고 하는 소리네.’라며 빽 소리치고 싶었다. 지쳤다. 지쳐서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남편의 말이 무슨 뜻이고, 어떤 의도인지는 안다. 근데 어디 그게 쉽나, 당장 애들은?  


#유리천장지수 : 한국, 29개국 중 29위


아, 그리고 또 알고 있는 게 하나 있다. 회사생활이 얼마 안 남았다는 거다. 일반 직원 중에 나보다 나이 많은 여자 직원은 손에 꼽힌다. 임원까지 다 따져도 열 손가락이 다 꼽히지 않는다. 이제 정말 5년 정도 남은 것 같다. 불안하고, 무섭기까지 하다.


뭐해 먹고사나. 20대 때 고민을 여전히 하고 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거다. 아이들에 양쪽 부모님들까지, 부양해야 할 가족은 몇 배로 늘었다. 대신 나를 부양해주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그나마 남의 편인 남편 정도?


만약 5년 후 퇴사한다면, 적어도 지금과 비슷한 삶을 살 순 있을까? 그나마 집이라도 갖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1 주택자이니 정부의 정책에도 휘둘리지 않고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지 않겠냐고? 응, 아니다. 부양가족만큼 곱절에 곱절로 늘어나는 생활비, 줄지 않는 원금, 따박 따박 빠져나가는 이자비용. 맞벌이가 외벌이로 변하는 순간, 한 방에 무너질 수 있다. 그때가 와도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에서는 계속 살 수 있을까?


그럼 이사하면 되지 않겠냐고? 싫다. 이마저도 사라지면 내 청춘은 무엇을 위해 존재했나. 결혼하고 해외여행 한 번 안 가고, 아이들 기저귀까지 재사용하며 아끼고 저축한 일생을 이 집에 담았다. 이 집이 끝나는 순간 내 삶도 부정될 수 있다.


이 집이어야 한다. 아이들이 안정적으로 학창 시절을 보내려면, 그래 이 동네여야 한다. 아이들의 친구들도 다 이 동네에 있다. 걸어서 통학할 수 있고, 공부를 도와줄 학원도 많다. 좋아하는 빵집과 익숙한 마트가 있고, 산책로도 가깝다.


이 동네에 계속 살고 싶다. 퇴사를 하고, 운이 좋아 무언가 일을 계속한다고 해도, 그 후 아예 은퇴를 한 뒤에도 말이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지하철역이, 백화점이, 공원과 냇가가 있는 이 동네가 좋다. 백화점이든, 온라인 쇼핑에서든 배송지에 적는 주소가 계속 이 동네였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독립하면 주변의 어르신들처럼 주말 아침 가까운 빵집 야외 테라스에서 브런치를 즐기고, 저녁이면 천변을 산책하며 생각을 나누고 싶다. 각종 행사가 많은 서울에서 더 멀어지고 싶지 않다. 그래, 욕심이다.


당장 대출이 문제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사면서 주택담보대출뿐만 아니라 회사에서 지원하는 신용대출도 받았다. 퇴사 즉시 전액 상환해야 하는데, 퇴직금으로도 충당이 안 되는 액수다. 회사원의 보람을 돈으로 따질 순 없지만, 퇴사 즉시 대출 상환에 쓰일 테니 따질 수 있는 기회조차도 없는 게 현실이다.


그래도 많이 오르지 않았느냐고? 맞다. 아파트 가격 인상률이 연봉 인상률을 훨씬 상회해왔다. 최근엔 더했다. 그럼 된 거 아니냐고? 응, 아니다.


삶의 질이 나아진 게 없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이, 10억 원이든, 100억 원이든 내 손에 들리는 건 때마다 고장 나는 전구와 수명을 다한 건전지들뿐이다. 매달 빠져나가는 이자액도 변하지 않는다. 퇴사를 하면 회사 지원 대출을 일반 신용 대출로 바꿔야 하는데, 이러면 오히려 이자비용은 더 많아질 것이다. 그나저나 퇴사 후에 신용 대출이 가능하긴 할까? 어쨌든.


아무리 집값이 올랐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또 있다. 이 집을 팔면 이 집을 다시 살 수 없다는 점이다. 세금에, 공인중개 수수료에, 변화에 수반하는 비용이 대기업 신입사원 연봉 수준이다. 판다는 자체가 마이너스다. 팔면 손해다.


계속 이 집에 살 수 있을까? 나의 경력과 능력을 알아보며 정규직으로 채용하길 간곡히 원하는 훌륭한 회사가 있지 않는 한, 피차 같은 남편의 유리지갑이 급격히 두꺼워지지 않는 한, 로또에 당첨되지 않는 한, 다른 집은 다 떨어지고 우리 집만 계속 오르는 기적이 나타나지 않는 한 이사는 불가피할 수 있다. 부양비는 점점 느는데, 벌이는 줄어들 테니 말이다. 아직 아이들이 중학교도 안 갔는데, 정말 큰일이다.


혹시나 해 이자지원 등 지원받을 수 있는 정책이 있는지 알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지원 대상 기준이 너무 가혹하다고 느껴진다. 심지어 여전히 남성 중심의 사회구조를 유도한다는 생각까지 든다.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힘든 사회에서, 각종 정책들의 기준은 중위소득 130% 정도다. 맞벌이의 경우 한 사람당 65%를 벌어야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건데, 이는 둘 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라는 것으로 느껴진다. 아니면 한 사람은 집에서 육아하고,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존재로만 여기는, 외벌이를 위한 정책인 것 같다. 여성의 사회진출을 응원한다는 공수표를 날리면서 말이다. 남편이 결혼 전부터 떠들던 ‘육아와 집안일은 여자가 하는 거야.’라는 말은 허튼소리가 아니었나 보다.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정작 이런 부류의 정책들의 대상이 아닐 테니 현실까지 섬세하게 고려하진 않을 것 같다. 평생 굶을 걱정 없을 그들은 본인들의 결정이 실제 어떤 마음을 들게 하고, 어떠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지 보다는 평균과 중위 값 등 숫자만 살펴볼 테니 말이다. 하긴, 앞으로 힘들어질 예정이든 아니든, 세상이 보는 지금 나의 모습은 중상층의 1 주택자이다. 스스로 살 길을 찾는 수밖에 없다.


어쨌든 이 집 만이라도 지키고 싶다. 하루가 다르게 조여 오는 퇴사 압박과 쑥쑥 크는 아이들, 그리고 끝을 모르고 치솟는 아파트 가격과 그에 따른 세금 등에 당장 5년 후가 걱정이다. 노후가 아니다. 내 나이 50도 안 돼 삶이 끝장날까 두렵다. 학습지 방문 선생님이라도 준비해야 할까? 공인중개사 시험을 봐볼까? 아니면 경매 공부라도? 당장 집안일을 해야 하고, 내일 아침에 출근도 해야 하는데?


그래서일까, 작은 오피스텔이나 빌라라도 하나 사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월세라도 받아 각종 비용을 메우게 말이다. 욕심이라고 해도 할 수 없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을 지켜야 한다. 회사에 다니고 있는 지금이 아니면 영영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부동산 시장에 쌍심지를 켜고 뛰어든 주부들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청춘을, 일생을 지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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