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도서관에서 빌려온 박완서 선생님의 <세가지 소원>을 건넸다.
꼭 보라고 강요하면 절대로 안 볼 것을 알기에,
"심심하면 보든가. 재밌드라. 엄만."
무심하게 책을 툭 던지듯 침대 발치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몇칠 후,
침대 발치에 있던 책이 침대 머리맡쪽으로 옮겨져 있길래
"봤니?" 물으니 "울었어" 하는 녀석.
"그래? 어느 부분이 좋았어?"
"그거.. 아기 태어날 때 엄마, 아빠,할머니가 어쩌구 저쩌구 하는거..."
좀 구체적으로 말해주면 좋으련만,
'어쩌구, 저쩌구, 그냥, 뭐 그런거' 류의 '귀찮아 단어'들로
성의없기 짝이 없는 대답을 하곤 하는 사춘기 초입의 초6.
하긴, 엄마도 책을 읽고 어느 부분이 어떻게 좋았는지,
구체적으로 답을 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지.
그래..그냥.. 박완서 선생님의 글을 읽고 눈물이 났다는 거..
그것만으로 이미 넌 답을 준 건데,
어리석은 에미의 우문에 현답이구나.
잘 크고 있어서 감사해.
사랑한다 아들.
아들이 눈물이 났다는 글은 2009년 <마음산책>에서 출판한 박완서 선생님의 <세가지 소원> 중 '참으로 놀랍고 아름다운 일'이라는 작품이다.
골목 속의 젊은 새댁에게 아기가 찾아온다. 아기의 탄생을 기다리며 엄마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것만 보고, 이쁜 말만 하고, 보드라운 옷과 이불을 짓고, 아빠는 방구들을 고치고, 아기 침대를 고치고, 놀이터의 그네를 고치며 아기 마중을 준비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행복과 불행, 태어나고 죽어감을 수없이 보며 오래오래 살아온 할머니는, 돈 주고 산 어떤 선물보다 아기를 행복하게 해 줄 거라 굳게 믿는 선물을 벌써부터 준비하고 계신다. 그 선물은 바로....
(이하 소설에서 인용합니다)
할머니가 몰래몰래 마련하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눈에 보이는 어떤 선물보다도 으뜸가는 선물이란 다름 아닌 이야기입니다.
(중략)
아무리 많은 사물과 만나도 그 속의 비밀과 만나지 못함은 헛것이고, 그런 헛만남만 연속되는 삶이라면 아무리 오래 살아도 헛산 것이라고 할머니는 생각합니다.
헛만남이란 마치 수박의 겉을 핥기만 하고 나서 수박 맛을 보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만약 꼭꼭 숨어있는 비밀을 만나지 못하고, 곁만 보거나 핥는 것으로 과일과 만난다면 수박은 참외보다 위대하고,참외는 사과보다 위대하고, 사과는 앵두보다 훌륭한 것입니다.
그러나 앵두엔 앵두의 비밀이, 사과엔 사과의 비밀이, 참외엔 참외의 비밀이, 수박엔 수박의 비밀이 있기 때문에, 앵두는 수박에 비해 형편없이 작은 과일이지만 수박과 동등합니다. 수박과 앵두는 서로 다른 자기만의 비밀을 가지고 있을 뿐, 결코 누가 잘나고 못난 비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비밀은 사물을 제각기 없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떳떳하게 독립시키고 평등하게 합니다.
수박은 아무리 커도 앵두나 사과를 자기에게 속하게 할 수 없습니다. 앵두는 앵두의 비밀이 있기 때문에 수박에게 주눅들 필요가 없습니다.
사물은 제각기 가진 비밀 때문에 서로 평등할뿐더러 자유롭습니다. 사물의 비밀은 이렇게 제각기 사물이 있게끔하는 목숨같은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나와 있기보다는 꼭꼭 숨어있으려 듭니다. 사람의 꿈만이 꼭꼭 숨은 사물의 비밀을 여는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꿈이 없으면 수박을 핥고, 참외를 핥고, 사과를 핥고, 앵두를 핥고, 그리고 나서 수박이 제일 위대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사람의 삶에 대해서도, 3층집에 사는 사람이 단층집에 사는 사람보다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장이 농사꾼보다 잘났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제아무리 많은 과일을 핥았어도 한 알의 앵두를 먹어본 사람보다 어찌 과일에 대해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제 아무리 오래 살고 여러 사람을 사귀었어도, 인생을 통해 단 한사람의 진실과 만난 사람보다 어찌 참으로 살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할머니가 이야기 선물이야말로 아기에게 으뜸가는 선물이라고 으스대고 싶은 것은 이런 까닭에서입니다.
할머니는 아기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 줄 작정입니다. 아기에게 꿈을 줄 작정입니다. 아기는 커가면서 꿈을 열쇠 삼아 사람과 사물의 비밀을 하나하나 열 수 있을 것입니다. 참답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아기 오는 날이 가까워질수록 할머니의 나날은 저녁노을처럼 찬란해집니다. 깜깜한 밤이 오기전에 잠깐이나마 노을이 있다는 것은 참 놀랍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박완서, 참으로 놀랍고 아름다운 일 中-
아들이 어느 대목에서 눈물이 난 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위의 대목에서 눈물이 흘렀다.
아.. 나는 참 헛살았구나.
꿈도 없이, 날름날름 혓바닥만 놀리며
목마른 줄도 모르고 겉만 핥고 살았구나.
앵두 한 알 삼켜보지도 않고
남의 밭의 커다란 수박만 쳐다보며 달겠지...헛꿈을 꾸었네.
이제라도 나에게 진짜 이야기를 들려주어야겠다.
꿈이 있는 진짜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