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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무한한 생명력

희생적 본능

by 타조

이른 아침, 동이 튼 하늘이 점점 밝아지는가 싶더니 낮은 산 어깨에서 붉은 해가 솟아오른다. 아직도 한밤의 냉기를 차분하게 품은 대지가 조금씩 흔들리는 것 같더니 이내 반짝인다. 새벽에 내려앉은 이슬에 빛이 굴절되며 보도블록 위를 반짝반짝 빛낸다. 인도와 주택단지 사이에 조성된 완충 공원의 바닥에 수북이 쌓인 낙엽은 지난날 내려 덜 녹은 눈과 새벽 이슬이 서로 앞다퉈 빛을 쏟아낸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반짝이는 공원 바닥은 값비싼 보석이 숨겨져 있을 것만 같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나무는 제 잎을 다 떨구고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채 붉은 햇살을 따스히 받는다. 해는 차가워진 대지를 포근하게 어루만지며 산 어깨를 짚고 그 위로 떠오른다. 얼굴과 손을 훑고 지나가는 차가운 바람에 몸을 살짝 움츠렸지만 시선은 반짝이는 빛에 머문다.


지금 황량해 보이는 풀밭은 한때 온갖 생명이 몸 부대끼며 살던 곳이었다. 때로는 따스하고 때로는 강렬했던 햇살이 내려앉던 곳, 살랑거리거나 매섭게 바람이 불던 곳, 빗방울이 간지럽히듯 떨어지거나 매섭게 쏟아지던 곳. 생명이 사는 터전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여전히 생명이 살고 있다. 추위를 피해 땅속으로 숨어 들어간 수많은 생명들이 이 추위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간혹 따뜻한 날에는 어김없이 푸르고 어린잎을 내밀며 언제든 솟아오를 기회를 엿본다. 이후 찾아온 강추위에 그 시도가 무위로 돌아가곤 해도 말이다. 어떤 시련 속에서도 생명을 이어가려는 에너지가 있다.


어떤 의지를 향한 노력은 어쩌면 의식해서 갖추는 노력이 아니라, 영혼에 각인되어서 의식하지 않아도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행위일 수도 있겠다는 점을 위대한 자연을 통해 깨닫는다. 의지와 노력을 통해 누군가를 좋아할 수는 있지만 사랑할 수는 없지 않을까? 누군가에게 이끌려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나누고 정성을 다하고 싶은 마음이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랑이 위대한 까닭은 우리의 영혼에 사랑이 각인되어 있고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바쳐도 아깝지 않다는 마음이 불가항력적으로 솟아나기 때문이다. 보통 본능이란 경험에 의지하지 않고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이나 충동을 말하는데, 이런 본능은 생명을 유지하는 쪽으로 발현된다. 사랑을 본능이라고 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가진 희생적인 성격 탓일지도 모르겠다. 자신보다 사랑의 대상을 지키려는 마음이 본능의 기본 목적과는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사랑을 본능이라고, 희생적인 본능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랑을 할 때 우리가 느끼는 행복은 단순히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한 감정은 아니다. 동물들이 집단생활을 하면서 동료를 지키는 행위가 종족의 보존을 위한 활동이라면 인간의 사랑은 그것 이상의 가치를 지닌 감정적 행위이다. 생명을 지키기 위한 의미를 넘어선 가치를 가진 사랑은 우리의 인생에 꼭 필요한 감정이고, 단순히 상대에게 주어야 하는 일방적인 부분이 아닌, 서로 주고받아야 하는 상호적인 것이어야 한다. 다만 대가를 바라면서 이어지는 사랑이나 먼저 받은 후 형성되는 사랑의 마음은 오래 이어지기 어렵다. 두 사람이 가지는 적절한 마음의 왕래가 사랑을 가꿀 수 있는 기본 상태이며 두 사람의 마음이 자신의 입장보다 상대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희생적인 마음일 때 진정한 사랑으로 거듭날 수 있다.


우리는 하나의 사랑이 끝나면 또 다른 사랑을 찾으려 노력한다. 또한 사랑의 형태가 바뀔지언정 사랑을 갈구하지 않을 때가 없다. 사랑의 생명력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꾸준히 이어진다. 한 생명을 넘어서고 세대를 뛰어넘는 동안에도 사랑은 계속된다. 사랑의 생명력은 영속적이다. 영속적인 사랑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의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용기와 온기를 갖춘 사람일 것이다. 희생하지 못하는 겁쟁이로서 사랑의 전선에서 아무런 것도 얻지 못한 채 퇴각하여 돌아가는 패잔병이 되지 않길 바란다.


봄날의 사랑이 오길 기다리기보다 매서운 눈보라 속에서도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으로 살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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