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킬까 봐 무서웠어요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이라고 여겨졌던 경험

by 기역


무서움을 느낄 때 사람은 웃을 수 없다.

나 역시 무서웠기 때문에 웃을 수 없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숨바꼭질하는 기분이었다.

술래가 나를 잡기 전까지 들키면 안 될 텐데 하는 마음이었다.

내가 지나온 일들을 사람들에게 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왜 내가 아버지 얘기를 하면 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지,

교복 입은 남학생 무리를 보면 그 옆을 지나가기가 왜 싫은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열다섯 살의 나는 반에서 왕따였다.

뭐 하나 뛰어난 것이 없던 나를 담임 선생님은 외면했다.

나 이외에도 몇몇 아이들이 괴롭힘의 타깃이 되었지만 담임 선생님은 눈을 닫고 귀를 막았다.


괴롭힘은 나를 싫어하던 한 여자애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그 아이는 같은 반이 되기 전 학원에서부터 나를 괴롭혔던 아이였다.

나는 사회성이 부족했고 아이들과 잘 섞이는 아이가 아니었다.

내가 아는 척을 하거나 눈치 없이 튀는 행동을 했던 게 거슬렸던 모양이다.

교묘한 괴롭힘을 참다못한 내가 엄마에게 말했고 엄마가 그 일로 학원에 찾아오셔서 세명의 애들을 만났다.

학원을 그만 다닐 뻔했지만 아이들끼리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 잘 지내라고 억지로 표면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필 주동자격인 아이와 같은 반이 되었다.

그 아이의 괴롭힘은 노골적으로 변했고 다른 아이들까지 나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내가 불리고 싶지 않은 별명으로 나를 부르는 것은 일상이었고

먹던 젤리를 나를 향해 뱉거나, 수업 중에 책으로 내 뒤통수를 때리기도 했다.

'그냥 장난'이라는 이유로.

유치한 행동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나에겐 고스란히 상처가 되었다.

열다섯 살의 내게는 죽고 싶단 생각을 하게 할 만큼 큰 스트레스였다.

애들이 싫어할만한 행동을 내가 했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해선 안 됐다.


함부로 대해도 되는 대상이라고 여겨지는 건 끔찍했다.

동네북이 된 기분, 얼마나 질긴 생명력을 가졌는지 실험당하는 기분.

언제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마음 졸이는 생활이었다.

학교에 가기 너무도 싫었지만 학교를 그만두는 선택지가 없었다.

엄마에게 말해서 상황이 더 악화될까 봐 말할 수 없었다.

엄마가 알까 봐 집에 돌아와서 혼자 침대에서 울고, 학교에 가서는 울지 않았다.

빨리 벗어나고만 싶은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지금은 가해자가 고개 숙여야 하는 분위기가 됐지만,

그때는 당한 사람이 바보고 X신이란 소리를 듣는 시절이었다.

만만해 보이면 무리에서 무시당하고 소외된다는 걸 느꼈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그 애들을 행여나 다시 만나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했다.

당한 사람은 나인데도 당당하지 못하고 피하고 싶었다.


경직된 인간들은 다 불쌍해.
살아온 날들을 말해주잖아.
상처받은 아이들은 너무 일찍 커버려.
그게 보여. 그래서 불쌍해.
드라마 '나의 아저씨' 중


사람의 유년시절은 종이의 속성을 갖고 있어서 '구김'이 가면 잘 펴지지 않는다.

자리가 잡힌 주름이 무슨 수를 써도 돌이켜지진 않는다.

하지만 다른 멋진 작품으로 만들어질 수는 있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어두운 표정의 지안에 대해 동훈은 말한다.

경직된 인간들이 불쌍하다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지안을 피하는데 동훈은 지안을 안타까워한다.

경직된 내 표정과 태도를 보고 사람들이 눈치챘을 거라는 걸 알게 됐다.

들키고 싶지 않고 만만해 보이고 싶지 않아서 경직된 내 표정에서

오히려 사람들은 나의 상처와 약함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숨긴다고 숨겨지지 않았겠구나 나의 구김이.


"쟤 왕따였대.", "쟤 찐따였대. 어울리지 마"

난 이런 말들이 무서웠다. 실제로 저런 말을 전해 들은 누군가와 갑자기 멀어진 적도 어릴 땐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가 받은 상처, 안 좋은 기억들 모두 햇빛이 안 드는 곳에 숨기기 바빴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을 무표정으로 대했다.

바보 같은 얘기지만 만만해 보여서 무시당하고 싶지 않아서 거리를 뒀다.

나에게 또 상처를 줄지도 모르는 사람으로 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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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가 다 얘기하고 나면 들킬 게 없다. 조마조마할 게 없다.

그래서 마음을 바꿨다. 다 꺼내겠다고.


얕은 물가에서만 놀면 수심이 얼마나 깊은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사실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시샘했다.

하지만 이미 물이 턱끝까지 차오르는 곳에 빠져본 사람은 물에 들어갈 때마다 수심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법이다.

더 이상 나의 결핍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을 거고 움츠러들지 않을 거다.

굳은 표정으로 내 아픔을 죄 없는 사람들에게 떠넘기지도 않을 거다.


*아모르파티(Amor Fati)로 가는 세 번째 마음가짐

내가 털어놓으면 들킬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경직된 표정이 아니라 미소로 사람들을 대하기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D


글쓴이/그린이: 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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